박종윤 소설가

 
한나라 고조는 장량의 도움으로 전쟁 때마다 위기를 벗어났다. 사마천은 그의 생애를 기록한 뒤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나는 그의 행적으로 보아 십중팔구 준엄한 용모의 남자려니 생각하였는데 초상화를 보니까 미녀와도 같았다. 공자는 용모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다가는 담대 멸명(공자의 제자로 얼굴이 못생겼다)과 같은 인물을 놓치기 쉽다고 경고한 바 있는데, 이 말은 장량의 경우도 같다.”

유후 장량은 한(韓)나라의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개지는 한(韓)나라의 재상으로 소후, 선혜왕, 양애왕을 섬겼고 아버지 평도 이왕, 도혜왕 때 재상을 지냈었다.

아버지 평은 도혜왕 23년에 세상을 떠났고, 그 20년 뒤에 한나라는 진(秦)나라에 멸망당했다. 그때 장량은 나이가 어려서 벼슬에 나아가기 전이었으므로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한나라가 멸망할 때 장량의 집안에는 부리는 사람이 3백여 명이나 되었다. 장량은 재산을 아낌없이 처분하여 자객들을 모아들이면서도 그의 아우가 죽었을 때에 장례도 치르지 않았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5대에 걸쳐 재상을 맡았던 한나라의 부흥을 도모하기 위해서 진왕을 암살하고 원수를 갚으려 한 것이었다.

장량은 일찍이 회양 땅에서 예를 배운 적이 있었다.

진의 시황제가 동쪽을 돌아다닌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곧장 회양으로 달려가서 동쪽 지역의 추장 창해군을 만나 장사를 구하였다. 장량은 이 장사와 함께 무게 1백 20근의 쇠몽둥이를 만들어 들고 시황제의 뒤를 밟았다. 그의 행렬이 박랑사에 다다랐을 때 매복하고 있던 두 사람은 쇠몽둥이를 시황제의 수레에 집어던졌으나 겨냥이 빗나가 수행원의 수레에 맞았다. 시황제는 몹시 화가 나서 범인을 잡기 위해 전국에 대대적인 탐색령을 내렸다. 진나라의 탄압정책은 이를테면 장량이 그 단서를 만든 셈이었다.

장량은 이름까지 바꾸고 멀리 하비까지 도망을 쳤다.

어느 날 장량이 하비의 다리 근처에서 서성대고 있는데 초라한 한 노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노인은 장량이 보는 앞에서 신발을 벗어 다리 밑으로 던져 버리고 장량을 불러 세웠다. “여보게, 다리 밑에 내려가서 신발 좀 주워 오게나.” 장량은 화가 치밀어 주먹을 불끈 쥐었으나 상대가 노인이므로 참고 신발을 주워 왔는데 노인이 다시 말했다.

“어서 내발에 신겨라.”

장량은 참기로 한 이상 별 수 없다고 생각하고 허리를 굽혀 노인에게 신발을 신겼다. 노인은 장량이 신발을 신겨주자 아무 말도 없이 빙그레 웃고는 그냥 가버렸다. 장량은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쳐다보고만 있었다. 저만큼 가던 노인이 되돌아왔다.

“보아하니 너는 장래성이 있는 놈이야. 닷새 뒤 새벽에 이곳에 오너라” 하고는 가버렸다. 장량은 영문도 모른 채 약속한 그날 새벽에 다리로 나가니 벌써 노인이 와 있었다. 노인은 장량에게 고함을 질렀다. “늙은이를 기다리게 하다니, 고연 놈 같으니라고” 하고는 휙 돌아서더니 “닷새 뒤에 다시 와” 하고는 가버렸다.

닷새 뒤 장량은 꼭두새벽에 첫닭이 울자 다리로 나가 보았으나 역시 노인이 먼저 와 있었다. “또 늦었네, 닷새 뒤에 다시 와” 하고는 이번에도 뒤돌아 가버렸다.

닷새 뒤 장량은 아예 한밤중에 일어나 다리로 나가 노인을 기다렸다. 잠시 뒤 노인이 휘적휘적 다리 위에 웃으면서 나타났다.

“됐어. 그 마음씨가 첫째로 중요한 것이야” 하고는 품속에서 책 한 권을 꺼내 장량에게 주었다. “이 책을 공부하면 후일에 반드시 왕자의 군사가 될 수 있다. 십삼 년 뒤에 자네는 분명히 신나게 한 판 벌이고 있을 거야. 십삼 년이 지난 뒤에 우리 다시 만나게 될 것일세. 제북땅 곡산성 기슭에 있는 황색 바위. 그것이 바로 나야” 하더니 장량이 되물을 겨를도 없이 어디론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날이 밝아 책을 펼쳐보니 태공망의 병법서였다. 장량은 그 내용에 반해 항상 머리맡에 놓고 있었다.

장량은 하비에 머물면서 임협의 무리와 잘 어울렸다. 항우의 작은아버지 항백이 살인 사건을 저지르고 장량의 도움을 받은 것은 그 무렵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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