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사)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지금 김정은 체제는 개혁과 개방이냐, 수구의 고수냐 하는 갈림길에서 제3의 길을 찾고자 고군분투하고 있다. 사회주의를 지키자니 ‘계획경제’가 고갈의 절정에 이르고 사회주의를 버리자니 ‘세습정권’이 위태롭다.

최근 일본의 특사가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갔지만 북한은 북-일 간에 이루어진 합의에 대해 일체 함구하고 있다. 개성공단이 김정일의 유훈이라면 북-일관계 정상화는 김일성의 유훈이다. 김정은이 김정일보다 김일성을 선호한다는 견지에서 보면 북-일관계 개선이야말로 김정은이 가야 할 미래가 분명하지 않은가.

김정은 체제가 일본에 접근하는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로 원조와 지원의 파이프라인이 점점 좁아지고 있는 북-중관계의 악화가 북한을 일본으로 기울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당장 미국이나 우리 한국과 관계 개선이 어렵다면 북한의 재건에 군침 흘리고 있는 일본이 제격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당장 북한에 돈을 집어줄 수 있는 나라 역시 일본밖에 없다는 것이 평양의 판단이다.

일본은 근대화 과정에서 아시아에서 벗어나 서구화하겠다는 이른바 ‘탈아입구(脫亞入歐)’의 정신이 있었고 이와 같은 신념은 아직도 존재한다. 만약에 북-일관계가 개선돼 일본이 북한 땅에 진출할 수 있다면 지난 70여 년간 좌절되어 온 일본의 대륙진출 꿈도 일거에 실현될 수 있다. 그 비용이 북한이 요구하는 전쟁배상금 300억 달러 정도로 이루어질 수 있다면 어느 누가 반대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지금 일본 정국은 보수와 혁신세력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장래에 대한 불안을 느낀 일본 국민들은 강경화 일변도의 아베노믹스에 열광하고 있다. 김정은 체제는 당장 수혈의 주사바늘을 꽂아줄 세력이라면 그가 어느 누구든 마다하지 않을 입장을 가지고 있다. 특히 북한 권력구조에서 항일세력들이 모두 사라지면서 다가오는 7.27 ‘전승기념일’을 계기로 ‘항일’보다 ‘전승’을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내세울 준비까지 마쳐놓은 상태다.

북한의 김정은 정권이 일본에 대해 선호하는 것은 단지 돈만이 아니다. 일본의 정치문화, 즉 일본 국민들의 심연에 확고히 자리 잡은 천황제야말로 북한이 긍정하는 가장 이상적인 정치체제라고 할 수 있다. 한때 태국의 왕정체제를 선호해본 적도 있지만 그것은 잦은 쿠데타를 유발한다는 점에서 일거에 배제되었다.

1867년 메이지 정부를 세운 주도세력은 지방 호족세력을 억누르고 일본의 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해 강력한 중앙집권식 국가체제와 국민통합이 필요했고 이 과정에서 천황제가 등장했다.

일본은 신국(神國)이고 일왕은 신이며 일왕을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 천황제다. 더구나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전범에 대한 국제재판소의 응징에서도 천황은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 김정은 체제가 어찌 이 정치체제를 선호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일본의 기미가요 가사는 “천황의 치세는 천대에서 팔천대까지(이어지리라)”라고 칭송하고 있고 북한의 수령숭배는 김일성을 “해와 달이 다하도록 모신다”고 신통히도 같은 신격화를 촉구하고 있다.

현재 김정은 체제는 군량미까지 풀지 않으면 안 되는 고갈과 피폐의 절정에 와 있다. 자신들의 체제 재생산을 위해서라면 그가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가릴 형편이 아닌 것이다.

북한은 이미 1994년 단군릉을 복원해 민족의 시조를 확보한데 이어, 김일성과 김정일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기념궁전을 이른바 ‘태양궁전’으로 작명해 죽었지만 살아있는 ‘신’을 확보한 상태다. 김정은이 일본과의 관계개선으로 전쟁배상금을 받아내 북한 인민들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도록 만들어 준다면 그는 살아 있는 ‘신’이 될 수 있다. 일본의 우경화로 한일관계가 꼬이고 있는 때에 북한은 돈에 굶주려 일본으로 다가서고 있는 한반도의 상황은 분명 통일에 어두운 그림자를 가져다주고 있다. 남북관계 발전의 신뢰프로세스는 이 점을 중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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