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주필)

 
5월의 자연은 싱그러운 신록의 세계다. 그 신록이 잿빛 도시를 살린다. 퇴거를 머뭇거리는 겨울 끝자락의 추위는 일찍 피는 봄꽃을 시샘한다. 그렇지만 초여름의 문턱인 5월의 신록은 그런 시샘을 받지 않는다. 그러니까 봄꽃들은 추위의 시련을 견디면서 화사하게 피어 봄이 왔음을 우리에게 알리는 셈이다. 그에 반해 마음껏 푸른 잎을 내고 가지를 뻗치는 5월의 신록은 추위의 샘을 받음이 없이 그저 봄을 즐기며 스스로를 뽐내기만 하면 된다. 잿빛 도시의 가로수 신록도 역시 그렇게 한창 제철을 구가한다.

신록의 존재감을 한껏 드러나게 해주는 것은 멋대로 살랑 살랑 부는 봄바람이다. 그 봄바람이 나뭇잎을 부드럽게 흔들어댄다. 그럴 때 그 나뭇잎을 무성하게 돋아나게 한 가지들도 덩달아 춤을 춘다. 봄바람이 나뭇잎을 흔들고 그 나뭇잎이 또 그것들을 돋아나게 한 가지를 흔들어대는 것이다. 봄바람은 봄을 반기는 모든 것을 흔들어 대어 봄을 느끼게 해주는 희한한 바람이다.

사람들이 봄을 타는 것은 봄에 피는 꽃과 싱싱한 신록 때문만은 아니다. 봄바람은 여우 바람이다. 그 여우바람이 사람들로 하여금 봄을 타게 한다. 그 바람은 고목에도 꽃이 피게 하고(古木開花), 싱싱한 새잎사귀도 돋게 한다. 그 여우바람, 그 봄바람이 봄 타는 사람들을 흔들어 대어 싱숭생숭 들뜨게 한다. 봄꽃이나 신록의 빛깔처럼 예쁘고 풋풋한 봄처녀들만을 들뜨게 하는 바람은 아니다. 점차 봄이 짧아지는 5월의 봄은 초여름에 가깝다. 그렇기에 꽃보다는 신록의 계절이다. 그럼에도 방향이 뚜렷한 계절풍은 아직 멀리 있다. 대신 어디서 불어오는지 어디로 불어 가는지 모를 종잡을 수 없는 바람은 계속 분다. 그렇다면 5월은 신록의 계절이라 해도 봄은 봄이다.

도시 가로수의 신록은 도로의 형편에 따라 쭉 뻗치거나 꼬불꼬불한 신록의 녹색 터널을 만든다. 어느 것이나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그 어둡지 않은 녹색 터널의 그늘은 가끔 씻어내지 않으면 도시를 닮아 삭막한 잿빛이 되어버리기 마련인 도시 사람들의 마음을 푸르게 바꾸어 놓는다. 굳이 바쁜 일손을 놓고 녹색의 바다인 산을 찾아 나서지 않아도 그 녹색의 터널을 잠시 걷거나 바라만 보아도 복잡한 일상을 지탱할 만한 최소한의 기분전환은 이루어진다. 그 가로수 녹색 터널 안에서 도시 사람들을 찌들게 하는 공해는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녹색의 행복감이 온 몸과 마음에 진하게 배어든다. 그래서 5월은 행복을 주는 계절의 여왕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5월 도심의 신록은 오히려 녹색 일색인 산의 신록보다 회색 빌딩을 살리면서 그것과 대조를 이루어 자신의 존재를 더욱 드러내는 귀하고 친근한 존재다. 우리의 경우 하늘을 찌를 듯한 도심의 높은 빌딩보다 키가 더 큰 가로수는 거의 없다. 그것은 정말 다행이다. 만약 도심의 빌딩보다 키가 훌쩍 더 큰 가로수가 빌딩들을 겨드랑이에 끼고 있거나 키가 빌딩과 같아 아스라이 높은 빌딩을 바라보듯이 그 가로수를 올려보아야 한다면 그것은 결코 사람들이 친근하고 귀하게 느낄 풍경은 못될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눈높이로도 충분히 보이거나 내려다보이는 것들도 있어야지 올려보아야 할 것들만 있다면 그건 너무 피곤한 환경이 될 것이다. 부와 사회적인 지위가 부를 쫓으면서 사람들은 아래를 보고 위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위를 보고 스트레스를 받기 예사인 것이다.

다행히 가로수의 우거진 숲은 명멸하는 교통신호등과 키 높이에 있어 경쟁을 하거나 조금 높거나 낮은 정도다. 저 멀리에서 살랑대는 나뭇잎과 찰랑대는 나뭇가지 사이로 몸을 드러냈다 숨었다하는 교통 신호등의 명멸하는 빨강 노랑 파랑의 불빛은 가로수의 신록과 기가 막힌 대조와 조화를 이루어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죽은 도시의 거리를 살아 움직이게 한다. 이 같은 풍경은 살벌한 도시에서 가로수가 앙상한 가지만 남는 쓸쓸한 계절에는 결코 맛볼 수 없는 신록의 계절 5월이 베푸는 축복과 같은 도시의 별난 풍미가 된다.

거리마다 사정은 다르지만 그것이 어디든 도시의 가로수는 지금보다는 더욱 더 촘촘했으면 좋겠다. 가로수가 촘촘한 녹색터널을 지날 때는 빌딩들은 가로수에 가려 높은 부분은 보이지 않는다. 가로수 키 높이만큼의 밑 둥지만 보이기 때문에 아무리 높이 솟은 빌딩들일지라도 그것을 가져볼 꿈도 꿀 수 없는 사람들에게 덜 위압적이다. 위가 보이지 않기에 부러 그 높은 첨단의 위를 올려보아 주눅이 들거나 스스로의 왜소함을 느끼고 체념의 스트레스와 싸울 필요가 없다.

사람의 행복은 사회적 지위나 부의 크기, 소유한 빌딩의 높이가 결정하거나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행복하고 안 하고는 그 다음 문제이고 그런 것들을 이루어나 보고 가져나 봤으면 하는 것은 누구나 갖는 천부의 인지상정이다. 따라서 그 같은 욕심과 성취욕이 시비 거리가 될 수는 없는 것이로되 사람은 역시 그것에 너무 집착하는 무모함을 버리거나 포기할 줄도 아는 현명함을 타고 났다. 따라서 올라갈 수 있는 나무가 아니라고 생각된다면 차라리 5월의 신록을 즐기면서 깨끗이 머리를 비워버리는 것이 진정으로 사람이 행복해지는 길이다. 마음을 비울 줄 안다면 부족한 가운데서도 그것으로도 사람은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

서울 도심에 사방이 꽉 막힌 자신만의 공간을 벗어나 5월 신록의 녹색 터널을 여유롭게 감상하고 기분전환을 이룰 수 있는 공간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런 공간에서는 밀폐된 실내로 들어가지 말고 바깥에 깔아 놓은 자리를 잡아 신록과 신록을 제 멋대로 흔드는 바람이 이끄는 눈길을 돌린다면 몸과 마음은 녹색에 흠뻑 젖는다. 그것이 잠시일지언정 그동안만은 시간이 멈추어 사람을 바쁘게 몰아세우지 않는다. 권력이나 돈이 많아 근심 걱정 역시 그 만큼이나 많아서 즐거움과 함께 고통에서도 벗어날 순간이 없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으므로 행복감만으로 빈자리를 채워 행복의 포만감을 느끼는 것도 나쁠 것이 없다. 5월이 지나가면 늦다. 더구나 국민행복시대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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