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천하의 근심을 먼저 걱정하고, 천하가 즐거워진 후에 즐거워한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는 말은 북송의 정치가이자 문학가였던 범중엄(范仲淹, 989~1052)의 악양루기(岳陽樓記) 맨 마지막에 들어있다. 이 말은 중국총리였던 주룽지가 가장 좋아하여 각광을 받았다. 송대 사대부의 기풍을 세웠다는 평가에 걸맞게 그는 군자로서의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며, 요즈음 유행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철저히 실천했다.
‘하늘에는 천당 땅에는 소주(蘇州)와 항주(杭州)’라는 미명으로 유명했던 소주 출신으로 자를 희문(希文)이라 했던 그는 어려서 집안이 가난하여 매일 죽을 끓이고 죽이 굳으면 4조각을 낸 다음 아침, 저녁으로 두 개씩 먹었으며 그래도 배가 고프면 풀뿌리나 나물로 배를 채웠다. ‘단제획죽(斷薺劃粥)’은 그의 어린 시절을 삶을 나타내는 유명한 말이다.

어느 날 범중엄이 밥을 먹고 있을 때 친구가 찾아왔다. 그는 너무 초라하게 사는 친구가 안타까워 약간의 돈을 주었다. 범중엄은 완곡하게 사양했다. 다음날 친구는 맛있는 음식을 보내주었다. 며칠 후 다시 찾아갔더니 자기가 보낸 음식이 모두 상해있었다. 친구가 너무 지나치지 않으냐고 묻자 범중엄은 이렇게 말했다.
“오해하지 말게. 평소처럼 죽과 짠지를 먹을 수 없을까 염려되었을 뿐이라네.”

어떤 사람이 범중엄에게 포부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훌륭한 의사나 유능한 재상이 되고 싶소. 훌륭한 의사는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칠 수 있고, 유능한 재상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오.”

훌륭한 사람은 평소부터 남다른 포부를 품는다. 사람의 행동은 생각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범중엄은 부강한 나라를 만들려면 교육과 관료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육이 성공하려면 우선 학교와 훌륭한 스승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전국에 학교를 세우고 선생의 자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시책을 실행했다. 송이 일시적이나마 건전한 기풍을 유지하고 유능한 인재를 배출한 배경에는 그의 노력이 있었다.

유명한 정치가이자 문학가였던 구양수(歐陽修), 철학자 주돈이(周敦頤), 장재(張載)는 그가 발탁한 인재였으며, 신법개혁으로 유명한 왕안석(王安石)도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3번 출사했지만 모두 죄를 얻어 외직으로 쫓겨났다. 억울하지 않느냐고 묻자 ‘사사로운 죄를 짓지는 않았지만, 공적인 죄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고 기꺼이 받아들였다. 지방관으로 전출된 그는 구휼과 수리사업, 그리고 교육에 치중하여 백성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지방으로 전전하는 동안 그는 백성들의 고통을 동정하는 여러 편의 시를 짓기도 했다.

1038년, 이원호(李元昊)가 서하(西夏)에서 제위에 오르자 산서경략안무초토사(山西經略按撫招討使)로서의 책임을 완수했다. 추밀부사(樞密副使),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승진했지만 하송(夏悚)과의 불화로 다시 지방관으로 좌천되었다. 1040년, 섬서의 경략안무사로 부임한 그는 5년 동안 변방의 요새를 5년 동안 지키며 서하의 침략을 막아냈다. 변경의 군사들과 백성들은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군중유일범중엄(軍中有一范仲淹) 서적문지량파담(西敵聞之驚破膽)
군중에 범중엄 한 사람만 있으면, 서쪽 적들은 놀라서 간담이 찢어진다네.
60세의 범중엄은 항주지주로 부임하여 2년간을 보냈다. 자제들이 서호에 별장을 지어두었다가 나중에 살라고 권유했지만 단호하게 물리치며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진실로 도의를 즐기려면 몸에서도 벗어나야 하는 것인데, 하물며 집안에 머무를 수가 있겠는가? 내 나이 이제 60을 넘었으니, 앞으로 얼마나 더 살겠다고 집을 짓고 정원에 나무를 심겠는가? 나의 고민은 지위가 높아져 물러나지 못하는 것이지 물러나서 머무를 집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는 녹봉을 털어 모두 친척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진정한 제세정신(濟世精神)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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