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뚝 서는 코리아-한산모시짜기] “서늘한 한산모시, 마음까지 시원하게 만들어요”
[우뚝 서는 코리아-한산모시짜기] “서늘한 한산모시, 마음까지 시원하게 만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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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0년 명맥을 이어온 한산모시짜기를 시연하고 있는 방연옥 선생. ⓒ천지일보(뉴스천지)

 

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 방연옥 선생 인터뷰

[천지일보=이현정 기자] “작년 11월이죠. 한 열 시쯤 전화가 한 통 오더라고요. 문화재청에서 느닷없이 축하한다고 해서 놀랐어요. 내가 무슨 말씀이시냐고 되물었더니 아직 방송 못 들었느냐고 하더라고요. 그제야 알았죠. 한산모시짜기가 유네스코에 등재됐다는 걸요. 정말 깜짝 놀랐지만 정말 기뻤어요.”

당시만 생각해도 놀라고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다는 듯 웃음이 얼굴에 가시질 않는 방연옥(68) 선생은 수줍어하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카메라 앞에 당당히 전달했다.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방 선생은 어릴 적부터 어머니와 언니들이 모시짜기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봐왔고 여섯 살부터는 고사리 손으로 모시를 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0살부터 본격적으로 모시짜기를 배워 서천군 한산면의 1500년 한산모시의 명맥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시골 아낙, 문화재가 되다

 

▲ 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 방연옥 선생. ⓒ천지일보(뉴스천지)

충남 서천 기산면 토박이인 방 선생은 옆 마을 한산면으로 시집왔다. 한산면에는 한산모시짜기의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문정옥 선생이 거주하고 있었다. 처음엔 ‘문정옥 아주머니’라고 부르며 문정옥 선생의 모시짜기 일을 도와주던 동네 아낙 중 한 명이었던 방 선생.

 

모시짜기 일을 재밌어하고 꼼꼼하게 짜는 방 선생의 솜씨를 눈여겨봐 온 문 선생은 어느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날도 문정옥 선생님 마당에 가서 모시짜기를 도와드리고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이수자가 돼서 문화재가 되어볼 생각이 없느냐고. 그때만 해도 문화재가 뭔지 잘 몰랐어요. 그래서 어리둥절하니 선생님께서 집에 가서 아기 아빠랑 상의해 보라고 하더라고요.”

문 선생은 문화재가 되기 전에 그 솜씨를 인정받은 인물로 그야말로 모시짜기의 달인이었다. 그러한 명인이 한마을에 사는 아낙네에게 문화재의 명맥을 이어주길 희망했던 것. 방 선생의 재주를 살리고 한산모시를 이어가길 바라는 문 선생의 마음이 통했던 것인지 방 선생은 곧 전수학생으로 등록해 한산모시를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방 선생은 ‘문화재가 무엇인지는 잘 몰라도 열심히 배워보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세우며 문 선생에게 한산모시짜기를 사사받았다.

1980년부터 전수학생 신분으로 한산모시짜기를 배운 방 선생은 보통 5년간의 전수기간에 1년을 더해서 총 6년의 수련기간을 거쳤다.

문 선생이 혈압으로 쓰러져 제대로 가르쳐줄 수 없게 돼 방 선생은 원래 전수기간을 넘어서 1년간을 더 복습하는 시간을 가졌다.

어렵게 문 선생에게 한산모시짜기를 사사받은 방 선생은 시간이 지날수록 문화재라는 것이 힘든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혼자서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인고의 시간을 보낸 뒤 마침내 기예능보유자로 정식 인정을 받은 방 선생은 문화재로 한산모시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오늘도 베틀 위에서 씨줄과 날줄을 잇고 있다.

◆여인네의 피·땀·침으로 완성되는 명품 ‘한산모시’

“어릴 때 우리 어머니가 모시 배운다고 하면 안 가르쳐 준다고 하셨어요. 그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거든요. 그런데 우리 딸이 모시짜기를 배운다고 했을 때 고맙기도 했지만 힘든 걸 아니까 우리 어머니가 하신 말씀 그대로 딸한테 해줬어요. 그래도 열심히 배우고 노력해서 이제는 제법 해요. 다행이죠.”

한산모시짜기는 다른 모시와 달리 질감이 좋고 백옥처럼 하얗고 잠자리 날개처럼 가벼워 여름옷감으로 안성맞춤이다.

이처럼 명품 옷감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그 과정 또한 만만치 않다. 재배와 수확부터 시작해 태모시 만들기, 째기, 삼기, 굿 만들기, 날기, 모시매기, 짜기, 표백 등 의 순서를 거친다.

특히 모시풀이라는 식물 껍질을 벗겨서 말린 다음 그것을 앞니로 쪼개는 과정은 입술이다 부르트고 피가 날 정도로 매우 고단한 작업이다. 또 여러 과정을 거쳐 베틀에서 모시를 짤 때도 건조한 날에는 모시가 다 바스러져서 기후가 안 좋다 싶으면 한여름에도 문을 다 닫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을 해야 한다.

그야말로 여인네들의 땀과 피와 침과 눈물이 고스란히 베여야 하나의 명품으로 완성되는 것이 한산모시다.

이러한 노정을 잘 알고 있기에 방 선생의 어머니 또한 방 선생이 모시 배우는 것을 말렸더랬다. 하지만 옛날에는 모시를 많이 짜야 부자가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는 방 선생은 그저 모시짜기가 재밌고 신나는 일이라고 여겼다.

“옛날에는 먹고 살아가야 하니까 마을 사람들이 모시를 다 짰죠. 지금도 모시가 비싸지만 옛날에도 모시옷감은 비싼 돈을 주고 사야 했어요. 비싼 값을 치르려면 그만큼 모시를 잘 짜야 했고요. 그래서 시집살이를 모시짜기로 하시는 분들도 여럿 봤어요.”

‘모시 잘 짜는 며느리를 얻어야 좋은 며느리 얻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모시는 한 가정과 마을의 경제를 책임졌다. 하지만 모시짜기 과정이 쉽지 않아 마을의 많은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한 올 한 올 짜내려간 것이 모시짜기이기도 하다.

“나도 작업을 끝내면 아직도 피곤해요. 그래도 한숨자면 피로가 풀려요”라고 담백하게 고백하는 방 선생은 최근 후학양성에 노력하고 있다.

방 선생은 충청남도지정문화재 제1호 나상덕 선생과 함께 서천군에서 운영하는 한산모시tm쿨에서 학생 4명을 받아 모시짜기를 가르치고 있다.

이제 두 달째에 접어든 모시스쿨 학생들은 대부분 주부다. 통상 3년의 수련시간이 필요한 모시짜기에 초기과정을 밟고 있는 학생들이지만 방 선생은 이들이 기특하기만 하다.

모두가 힘든 과정을 거치겠지만 이 과정을 참지 못하면 그다음 단계를 넘어설 수 없는 것이 한산모시짜기라는 것을 방 선생은 몸소 보여주며 후학양성에 주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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