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견은 고대부터 내려온 맨손무술로 지난해 세계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며 세계로부터 인정받았다. 택견 기술 중 허벅 밟고 복장지르기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자연의 순리에 따라 몸 맡겨 흥겨운 동작
‘부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부드럽지만 강하게
일제 탄압으로 잠시 명맥 끊길 위기도

[천지일보=김현진 기자] 지난해 우리나라는 줄타기, 택견, 한산모시짜기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됐다. 그 중 택견은 무술로는 세계 최초로 인류무형유산에 오르는 영예를 안았다. 특히 중국의 쿵푸와 무술의 자존심을 걸고 경합을 벌여 단독으로 등재에 성공하는 쾌거를 냈다.

유네스코는 택견에 대해 “여러 세대에 걸쳐 전승된 전통무예로 전승자들 간의 협력과 연대를 강화하며, 목록 등재로 인해 전 세계 유사한 전통무예의 가시성을 높일 수 있다”고 평가했다. 바로 공격성이 강한 다른 외국 무술과는 차별화된 가치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물 흐르듯 부드러운 몸놀림 속에 강인함이 깃들어있는 택견은 먼저 공격하기보단 상대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는 것이 중심인 전통무예다. 택견은 예로부터 마을 간 단체경기를 가져 단합과 화목을 도모하는 등 의기투합하는 방법으로도 이용됐다.

이같이 택견은 무예로서 가치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즐길 수 있는 운동으로서도 가치를 인정받아 무술 최초란 수식어를 달고 등재에 성공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택견이 갖는 대중적 인식은 사뭇 다르다. 택견의 ‘이크’라는 추임새와 굼실거리는 동작만 보고 단순히 ‘우스운 무예’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세계도 인정한 우리의 무형유산 ‘택견’의 진면목을 살펴보자.

◆즐길 수 있는 무예
 

▲ 대쾌도 (제공: 결련택견협회)

택견은 198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된 우리민족 고유의 전통무예다. 택견은 우리 선조들이 오랜 세월 동안 갈고 닦고 온 맨손의 겨루기 기예로, 그 기본은 차고 때리는 격술보다는 상대의 힘이나 허점을 이용해 차거나 걸어서 넘어뜨리는 유술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 즉 상대를 위협하기보단 자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호신술에 목적을 뒀다 할 수 있다.

동작들은 ‘굼실굼실’되거나 ‘우쭐우쭐’거리면서 부드럽게 움직이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탈춤과도 같이 경쾌하지만 안에서 우러나오는 힘은 상대를 일시에 절명시킬 만큼 대단하다. 하지만 택견은 이 같은 위력을 이용해 격투로 사용한 무예가 아니라 마을 대 마을이 명예를 걸고 시합하는 동시에 주민들 간 화합을 돕는 전통 민속경기로 사용됐다.

이는 조선후기 화가 유숙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대쾌도’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대쾌도에는 씨름과 함께 택견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것이 곧 공격성이 강한 여타 외국 무술과는 다르게 즐길 수 있는 무예이기도 한 택견의 차별성이자 멋이다.

◆자연스러움과 자유로움
택견의 굼실굼실하는 오금질, 세 박자 품밟기는 마치 흥에 겨워 리듬을 타고 풍류를 즐기는 듯하다. 쿵푸 등의 중국무술은 화려하고 곡예적이고, 가라데의 일본무도는 조직적이고 획일적이라면 택견은 전통무용같이 자연스럽고 자유스러운 것이 특징이다.

그러면서도 자연의 순리에 역행하지 않으면서 용이하게 적을 제압할 수 있는 자연동화적(自然同化的)인 우리 조상의 슬기와 혼이 담겨있다. 인위적으로 무리한 동작을 만들거나 강하게 보이기 위해 일부러 힘을 넣지 않고 ‘부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자연의 순리에 맞게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택견은 부드러움과 강한 힘이 동시에 내재돼 있는 것이다.

 

▲ 청계천 새물맞이 공연 (사진제공: 결련택견협회)

◆택견의 역사
택견이 언제부터 어떻게 전승돼 왔는지는 정확히 확인되고 있진 않다. 고구려 무용총이나 삼실총 등의 벽화에는 맨손 무예를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것이 택견이라고 단정할 순 없지만 뿌리가 됐을 것이라는 데는 거의 이견이 없다.

우리의 맨손무예의 명칭이 정확하게 사료에 기록된 것은 고려시대부터인데, 고려사실록에는 ‘고려에는 수박(手搏)이라는 무예가 있어 궁중에서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널리 성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군사를 뽑을 때 정규시험 과목으로 수박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조선시대까지 맨손무예를 수련해 왔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맨손무예가 수박이란 이름으로 표현돼 내려오다가 택견이란 이름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조선 22대 왕인 정조 때이다. 이성지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만물보(또는 재물보)’ 책에는 ‘변 수박은 변이라 하고 각력은 무라고 한다. 지금에는 이것을 탁견이라 한다’고 나와 있다.

이를 보아 택견의 유래를 적어도 삼국시대나 그 이전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택견이 우리 겨레의 뿌리를 이어받은 한민족 고유의 전통무예임을 방증한다.

이처럼 택견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구한말(舊韓末)까지 대단히 성행했으나 일제강점기에 ‘민족문화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엄격히 금지당해 쇠퇴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택견이 우리 민족의 저항 수단이 되고 마을의 단결력을 고취시킨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해방 후에는 아주 없어질 위기에 놓였으나, 다행히 조선의 마지막 택견꾼인 故 송덕기(1893~1987) 옹에 의해 택견이 명맥을 간신히 이어오게 됐다. 1983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는 80년 만에 세상에 다시 알려졌고, 현재 유네스코에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됨으로써 전 세계로 뻗어나가게 될 자랑스러운 위치까지 오게 됐다.

 

▲ 조선의 마지막 택견꾼 故 송덕기 옹 (사진제공: 결련택견협회)

◆옛 경기 모습 그대로 재현 ‘택견배틀’
택견은 구한말까지 여러 사람이 편을 짜서 마을 대 마을로 시합을 해왔다. 이를 ‘결련택견’이라 불렀다. (사)결련택견협회(회장 도기현)에서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결련택견의 규칙보다 폭을 더 넓혀 모든 맨손 무예인이 다 참가할 수 있도록 해 2005년부터 ‘택견배틀’이란 이름으로 매년 실시해 오고 있다.

경기규칙은 각 팀이 5명씩 출전해 1대1로 겨루는데, 승자는 계속 남아서 상대팀 다음 선수와 계속 싸우는 방식으로 끝까지 살아남는 팀이 승리한다. 따라서 싸우는 순서는 정하지 않고 상대 선수의 특성에 맞게 즉석에서 다음 선수가 출전하는 방식이 되는 셈이다. 이로 인해 즉흥적인 작전 구사력의 묘미도 있다.

한 판씩 승패가 결정될 때마다 풍물패가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대결에 앞서 상대방의 기를 죽이기 위해 갖가지 기술도 선보이는 ‘본떼’ 등은 관중들에게 지루하지 않은 볼거리다. 또 승패 규칙도 아주 간단해 편안하게 즐길 수 있다.

승패는 상대의 얼굴을 발로 정확히 차거나 넘어뜨리면 바로 이기는 것으로 결정된다. 보통 격투기의 경우 상대가 넉다운 되거나 피를 볼 정도로 끝까지 싸워 승패를 결정하지만, 택견배틀은 실수로 맞았다거나 가볍게 넘어졌다 할지라도 단 한 번에 깨끗하게 ‘내가 졌다’고 순순히 승복하는 것이 규칙이다. 우리 선조들의 신사적인 스포츠맨십도 느껴지는 부분이다.

더구나 싸우더라도 상대에게 큰 부상을 주지 않고 제압을 하게 되며, 풍물패의 가락까지 곁들여져 있어 싸우는 경기라기보다 관객까지 다함께 즐기는 잔치 개념의 경기라 할 수 있다.

경기장소가 인사동 문화마당이라 많은 외국인들도 지나가던 중에 관심을 가지고 택견배틀을 관전한다.

한류로서도 많은 잠재력을 갖고 있는 택견배틀은 유네스코 등재에 힘입어 올해 새로운 도약을 준비 중이다. 대회는 4월말부터 9월까지 매주 토요일 대장정에 걸쳐 펼쳐진다.

 

▲ 인사동 문화마당에서 매년 펼쳐지는 택견배틀의 한 장면 (사진제공: 결련택견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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