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한국 산업 근대화의 주역’ ‘세기의 도전자’ ‘위기의 승부사’ 등 다양한 수식어가 방증하듯 현대경제사와 궤를 같이한 한국의 대표 기업가다. 아산이 일군 현대그룹은 자동차와 조선, 건설, 유통, 자재, 금융 등 주요 산업을 아우르는 글로벌 기업들로 성장해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적으로 한국 사회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90년대 정몽헌 당시 현대전자 대표이사가 직접 스카우트해 현대전자에도 몸 담았던 박광수 칼럼니스트가 올해 75주년을 맞은 현대그룹을 파헤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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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수 한국과학기술원 자문위원은 학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삼성전자와 LG전자, 현대전자 등에서 40년간 근무했다. 연구개발·생산기술·기획·품질관리·영업·구매 관련 분야를 망라한 것은 물론 영어와 일어에 능통해 미국 일본 등 해외주재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기업경영 컨설턴트, 기업초빙강의 전문가와 신문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천지일보 2022.08.18

 

<15> 조선 역사와 현대중공업

8000년 전부터 배 이용한 기록 있어

 15세기 콜럼버스, 아메리카 대륙 발견

 동력원 발전으로 선박 더 크고 빨라져

 

‘해상왕국’ 고려시대 해상 교통 발달

 조선시대 거북선 등 독창적 군선 개발

 해방 후, 현대 韓조선사업 발전 견인

 

조선의 의미는 배를 설계해 만드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현대식 호텔이나 수출에 필요한 대량운송 화물창고와 해상관광에 필요한 수많은 관광객 손님을 태우고 다니는 역할을 하는 큰 배를 만들려면 배에 필요한 재료도 다양하고, 제조하는 과정도 매우 복잡하다. 또 수작업이 수행되기 때문에 절대적인 시간과 치밀한 작업이 필요한 사업이 조선업이다. 따라서 얼마나 큰 배를 효과적으로 잘 만들어 내느냐가 그 나라의 조선공업과 기술력의 수준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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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경남 창녕 비봉리에서 발 견된 8000년전 신석기시대 조기 배 유적. (출처: 뉴시스)

◆8천여년 전부터 해상교통수단으로 배 이용

기록에 따르면 약 8000년 전에 인간들은 하천과 강을 건너기 위한 해상교통수단으로 배를 이용했으며, 구석기 시대에는 큰 통나무의 가운데를 파내고 배로 만들어 사용한 흔적들이 발견됐을 정도로 배는 중요한 교통수단이고 운반수단으로 이용됐다. 유럽의 네덜란드에서는 약 7000년 전의 것으로 추측되는 통나무 쪽배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런 종류의 통나무배들이 지속적으로 발전하면서 한 토막의 통나무로 만든 배에서 여러 토막의 통나무를 이어 붙인 배가 만들어졌고, 점차적으로 배의 규모가 웅장해지면서 노와 돛을 장착해 인간들이 직접 노를 젓는 선박으로 발전했다. 고대 역사를 살펴보면 대표적인 선박들은 인류 최초로 돛을 장착한 이집트의 배와 해상민족이라는 페니키아 배 등으로 구분됐다. 

그리고 영화 ‘벤허’를 보면 노예로 팔려간 벤허가 전함에서 군병들의 손 지시에 따라 좌우로 노를 저으며 빠른 속도로 배가 직진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이 장면을 통해 당시 설계된 조선식 배의 구조를 좀 더 이해할 수가 있다. 

중세시대의 바이킹 선박은 돛이 없고 노를 사용했으며, 뱃머리에는 용의 얼굴이나 동물 머리 등을 장착해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고, 배의 양옆에는 방패나 구조물을 달아 적으로부터 배를 보호했다.  

1450년 10월 31일 이탈리아 제노바 공화국 제네바에서 탄생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스페인에서 탐험가 및 항해사로 활동하면서 ‘지구는 둥글다’는 이론을 믿었고, 서쪽으로 계속 항해를 하면 언젠가는 지구를 한 바퀴 돌아서 중국과 인도에 도착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당시 그는 지중해를 점령하고 있는 오스만제국 땅을 거치지 않고 교역과 거래를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 이탈리아의 지도자에게 손을 내밀며 스폰서를 구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스페인 이사벨 1세 여왕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해상개척이 가능해 보였지만 그 과정은 험난했다. 오죽하면 이사벨 1세 여왕은 자신이 가장 아끼던 보석까지 팔면서 개인적으로 후원했다. 

이사벨 1세 여왕의 후원 목적은 레콘키스타 이후 스페인은 지중해 무역이 오스만 투루크 제국과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득세로 인해 설 자리가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또한 바로 옆 국가인 포르투갈이 항해왕자 엔히크를 필두로 서아프리카 지역 탐사로 막대한 이득을 취하는 것을 목격하고 서쪽으로 가는 신항로 개척이 국가의 미래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는 확신으로 후원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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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판옥선과 거북선 등 독창적인 군선이 등장했다. 사진 은 거북선 모형. (출처: 뉴시스)

◆20세기 들어서 빠르고 대형화된 선박

드디어 당시 돛을 이용한 배가 1492년 8월 3일 스페인 카디스를 출발해서 70여일 항해 끝에 1492년 10월 12일 지금의 바하마제도에 도착한 게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의 시초가 됐다. 이런 과정으로 태어난 미국은 영국과의 1783년 독립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오늘날의 세계 최강국 미국을 탄생시켰다. 

18세기 제임스와트가 압축증기 기관을 개발하면서 사람과 바람의 힘을 이용하지 않아도 되는 동력증기선이 개발됐다. 미국의 과학자 폴턴이 1807년에 최초로 증기선을 제조해 시운전에 첫 성공을 했으며, 그 후 30여년이 지나 1838년에 증기의 힘으로만 대서양을 건너는데 성공하면서 증기선 선박조선시대가 열렸다. 그 대표적인 선박은 바로 영국의 시리우스호로 알려졌다.

20세기 들어서 과학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으로 인해 증기기관선 시대는 저물고 디젤기관선, 증기터빈선 등 다양한 선박들이 개발됐다. 이로 인해 선박들이 대형화되고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도록 제조됐다. 

현재는 원자력기술을 이용한 전투함, 잠수함, 항공모함을 포함 다양한 선박(LNG전용선박, 자동차전용운반선, 컨테이너선, 10만톤급 초대형여객선, 호화유람선 쿠루즈 전용선박 등)이 제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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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중공업이 건조한 17만 4000 입방미터(㎥)급 LNG운반선의 시 운전 모습. (제공: 현대중공업그룹)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韓 선박 역사 

이제부터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대한민국의 선박역사를 살펴보면 약 8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통나무배가 경남 창녕 비봉리에서 발견됨으로써 오래전부터 배를 이용한 것으로 추정됐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각자 중국의 여러 나라들과 해상을 이용한 해외사절단을 파견하고, 여러 물물을 주고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자주 견당선을 당나라에 파견해 물물을 교환했고, 흥덕왕 시절 군사 1만명으로 청해진(지금의 전남 완도)을 설치해 장보고와 같은 인물을 통해 해적들을 소탕했다. 또 한반도 주변 서남해상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당나라와 신라, 일본을 이어주는 해상무역로를 통해 무역활동을 주도했다.

고려시대는 ‘해상왕국’이라 불릴 정도로 선박을 이용한 교통과 해상활동이 크게 발달했다.

고려시대 초기 이미 96척에 이르는 대형누선과 1000석을 운반하는 대형 조운선을 만들어 해운과 조선을 발달시켰고, 13세기 원나라와 연합해 일본을 원정할 때는 고려의 독특한 조선법에 따라 수많은 군선을 건조했다.

따라서 고려시대에 이미 조선법을 확립한 고유의 평저항선의 조선법을 더욱더 발전시키면서, 조선개국 초부터 상시적으로 수군을 유지했다. 특히 한국 특유의 판옥선과 거북선 등 독창적인 군선을 개발했다. 

당시 일본을 통일시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중국대륙 진출의 발판으로 삼아 1592년 4월 13일 조선을 침략하는 임진왜란 전쟁을 발병시켰다. 하지만 구국의 영웅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건재해 조선은 풍전등화의 멸망 직전에서 부활했다. 그리고 전 세계 해군의 우상이 된 이순신 장군이 유명한 명언을 남기는데 “죽으려고 하면 살 것이고,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 모두들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라. 그러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라는 말씀은 지금도 해전사에 두고두고 내려오는 전설로 남아 있다. 

당시 거북선(2층 구조로 1층은 노를 젓고 2층은 총이나 포를 쏠 수 있으며, 좌우에는 16~24개의 노가 있었음. 2개의 돛대가 있어서 빠른 속도로 나가 갈 수 있었고, 급속 회전이 가능한 전함이었으며, 지붕 위에는 적군이 뛰어 내리고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수백개의 철심을 박아 놓았음, 옆쪽뿐만 아니라 배의 앞과 뒤에도 포가 설치돼 사방으로 대포를 쏠 수가 있었고, 거북선의 앞쪽에는 용머리를 달았음, 용머리에서는 유황에 염초를 태운 연기를 뿜어 적들을 혼란하게 만든 전함이었음)을 앞세운 13척의 배로 명량해협에서 울돌목의 특성을 이용해 최후로 남은 133척의 일본 해군들을 몰살시키면서 이 전쟁은 조선의 승리로 마감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한국의 전통 조선법을 발전시켜 나가지 못하고 쇄국정책을 함으로써 조선은 1910년에 일본제국에 합방되는 불행한 역사를 겪게 됐다.

일제강점시기에는 일본인에 의해 조선업은 독점됐다. 1945년 해방 이후 1970년대 대한민국은 정주영 회장의 지시로 1973년 12월 창조와 개척정신으로 우여곡절 끝에 설립된 현대조선중공업의 조선사업 진출로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이러한 대한민국의 조선기술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으면서 선박왕국 대한민국으로 성장했고, 현대중공업은 전 세계 조선사업 역사상 가장 빠른 시기에 일본을 이기고 세계 1위 조선사로 발전했다.

(정리=유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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