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한국 산업 근대화의 주역’ ‘세기의 도전자’ ‘위기의 승부사’ 등 다양한 수식어가 방증하듯 현대경제사와 궤를 같이한 한국의 대표 기업가다. 아산이 일군 현대그룹은 자동차와 조선, 건설, 유통, 자재, 금융 등 주요 산업을 아우르는 글로벌 기업들로 성장해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적으로 한국 사회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90년대 정몽헌 당시 현대전자 대표이사가 직접 스카우트해 현대전자에도 몸 담았던 박광수 칼럼니스트가 올해 75주년을 맞은 현대그룹을 파헤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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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수 한국과학기술원 자문위원은 학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삼성전자와 LG전자, 현대전자 등에서 40년간 근무했다. 연구개발·생산기술·기획·품질관리·영업·구매 관련 분야를 망라한 것은 물론 영어와 일어에 능통해 미국 일본 등 해외주재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기업경영 컨설턴트, 기업초빙강의 전문가와 신문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천지일보 2022.07.29

<12> 한국자동차산업의 발자취

1967년 현대자동차주식회사 설립

당시 미국의 포드와 기술제휴 계약

포드, 기술개발 노하우 전수 안 해줘

 

정주영, 자신이 건설한 고속도로에

주행할 車 개발·생산할 큰 뜻 품어

비밀리에 독자적인 ‘車 생산’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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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현대 포니. (출처: 아산정주영닷컴)

자동차의 역사를 살펴보면 여러 가지 설이 나오는데 1482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벽시계에 태엽을 감다가 태엽의 풀어지는 힘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설계한 태엽자동차가 오늘날 자동차의 기원이 됐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실질적인 자동차의 원조는 1769년 프랑스의 니콜라 조셉퀴노가 개발한 증기자동차로 판단되며, 이 차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기계의 힘으로 주행한 차로 알려진다.

그리고 1824년 최초의 전기자동차가 개발됐으나 상용화는 1886년이 돼서야 성공했다. 그러나 전기자동차는 가솔린 내연기관의 개발로 인해 한순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1886년 독일의 메르세데스 벤츠 자동차의 공동 설립자 칼 벤츠가 최초로 가솔린엔진을 탑재시킨 자동차모델인 ‘벤츠 페이턴트 모토바겐’을 개발함으로써 현대 자동차산업의 초석을 놓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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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부터 자동차의 대중화를 이끈 역사적인 모델인 포드 모델T와 헨리 포드.

◆자동차 대중화 시대 연 포도의 ‘모델T’

1894년에 다임러가 아내의 생일날 250cc 회전식 핸들자동차 타입인 가솔린엔진을 장착한 시속 16㎞의 4륜 휘발유 자동차를 개발했다. 독일보다 20여년 늦게 1908년경 미국의 자동차왕국의 황제라고 불리는 헨리 포드가 켄베이어 벨트를 활용한 저렴한 모델인 포드T(통칭 T형 포드) 자동차를 양산하며 자동차의 대중화 시대를 개척했고, 이 차종은 1500만대 이상이 판매되면서 가솔린 자동차시장을 열었다.

1921년 뉴욕모터쇼에 클라이슬러 자동차회사는 배기량 3000cc의 6기통 엔진을 적용하고 당시에는 볼 수 없었던 에어클리너, 교환 가능한 오일필터, 4바퀴 유압브레이크 등을 장착한 획기적인 승용차를 출시했다. 1936년에 독일의 루돌프 디젤은 디젤 엔진을 개발하고 디젤자동차를 최초로 출시했다. 이후 1940년대 독일의 국민들을 위해 만든 국민차 타입의 ‘비틀’이 큰 인기를 끌면서 자동차시장을 주도해갔으며, ‘비틀’은 군용차 타입인 ‘퀴벨바겐’으로 변경하고 2차 세계대전 전쟁 현장을 누비고 다녔다. 1950년대 들어 세계 시장의 1위로 올라선 미국은 차량이 급속도로 보급되며, 미국 경제를 이끌어 가게 됐다. 1960년대에 연비가 좋은 차를 선호하면서 미니, 피아트500, BMW 이세타, 스바루 등의 자동차가 큰 인기를 끌게 됐다. 1970년대를 맞아서 화려하고 날렵하게 디자인된 자동차인 미국의 포드머스탱, 쉐보레, 카마로, 유럽의 페라리, 람보니, 포르쉐 모델이 출시되자 슈퍼카가 대중들의 인기를 끌면서 부호들은 부의 상징으로 이런 차들을 너도나도 구매해 타고 다녔다.

중동전쟁 종전 후 1980년대는 연비가 좋은 작은 크기의 쿠페나 헤치백 스타일의 차량들이 대량으로 출시돼 일반인들도 부담 없이 차를 구입하게 됐다. 이후 자동차산업은 연비절감을 위해 가볍고도 안전성이 높은 자동차가 출시됐다. 최근 하이브리드 엔진을 탑재한 가솔린 겸용 자동차와 수소차, 전기차가 개발되면서 본격적인 자동차 사업경쟁이 전 세계국가에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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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국산차 최초의 고유모델 포니 생산. (출처: 아산정주영닷컴)

◆대한민국 첫 독자개발 모델 ‘포니’ 탄생

대한민국에 자동차가 처음으로 도입된 시기는 1903년 고종황제의 의전용 차량으로, 미국공사의 협조로 포드사가 리무진타입으로 제작해서 들어왔다. 또 1911년 조선총독부 총독으로 부임한 ‘데라우찌’가 순종황제의 전용차와 조선총독부의 관용차로 캐딜락 타입의 다임러 리무진 차 2대를 수입해 업무용으로 타고 다녔다. 

국내 자동차 대수는 미비하지만 1918년 212대, 1931년 4331대, 1932년 4800대, 1940년에는 1만대로 늘어갔다. 

6.25전쟁 이후 1956년 서울에는 5335대의 자동차가 있었고, 이 중에 승용차는 1439대, 트럭이 1248대, 지프차가 1031대, 버스가 810대 정도로 집계됐다. 2022년 기준으로 보면 자동차 등록대수는 대략 2507만 180대로 가구당 2대 정도의 차량을 보유하고 있다.

현대그룹을 창설한 정주영 회장이 1940년 3월경 경기도 경성부 아현정(현 서을 아현동)에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정비공장을 설립한 게 오늘날 현대자동차의 근원이며, 1967년 12월 정주영 회장의 동생인 정세영 회장이 현대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당시 자동차 최강국인 미국의 포드 자동차와 기술제휴를 계약하고, 현대포드 코티나(1968~1971)와 왜건스타일의 현대포드20M(1969~1973), 현대 포드 뉴 코티나(1971~1977)를 생산 판매했다.

하지만 포드는 비교적 인건비가 저렴한 현대자동차가 자국의 부품을 수입해 하청으로 단순 생산을 하게 만들었고, 실질적인 자동차 개발기술에 대한 노하우 전수는 전혀 하지 않았다. 

이에 현대자동차는 다른 루트로 1973년 일본 미쓰비시 자동차와 손을 잡고 트랜스미션, 엔진, 후차 축 등에 대한 기술제휴를 하며 자동차를 생산했다. 

하지만 정주영 회장은 본인이 주도해 건설한 경부고속도로가 1970년 7월 7일 개통되면서 전국이 ‘일일생활권’이라는 신종어가 탄생됐고, 이를 계기로 고속도로를 주행할 자동차를 개발하고 생산해 세계에 판매하겠다는 원대한 뜻을 안고 있었다. 이 목적을 달성키 위해 독자적인 자동차 모델의 생산을 준비하면서 외부로 정보 노출을 하지 않고 자체개발을 비밀리에 추진했다. 이에 걸맞게 영국의 최대 자동차회사 브리티시 레일랜드 부사장으로 근무 중인 조지 턴불을 스카웃했고, 1973년 9월 이탈리아의 자동차 디자이너인 조르제토 주지아와 계약했다. 

이후 4도어에 일본 미츠비시의 4단 수동변속기와 4기통 1238cc의 새턴 엔진을 탑재한 대한민국 최초 독자개발 모델인 ‘포니(1976~1982)’를 1976년 아시아 국가에서는 일본에 이어서 두 번째로 출시했다. 이후 디자인을 조금 변경시킨 트럭 타입 현대포니 픽업과 현대포니 왜건도 출시했다. 한국 최초로 1976년 7월 에콰도르에 5대의 포니가 수출되면서 현대자동차는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포니는 현대자동차라는 브랜드와 한국의 독자개발 자동차라는 명성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고, 한국자동차 역사의 원동력이 됐다. 그리고 드디어 1974년 7월에는 1억 달러의 공사비를 투자해 연산 5만 6000대 규모의 자동차공장이 울산시에 건설되며 자동차 대량 생산이 본격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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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신차발표회장의 정주영 회장. (출처: 아산정주영닷컴)

◆한국 자동차의 태동과 발전과정

현대자동차가 생산되기 이전에 판매된 자동차의 원조는 1955년 8월 국내에서 제작된 첫 국산차인 ‘시발’이다. 이 차는 ‘국제차량공업사’라는 회사를 운영하던 최무성과 그의 3형제가 미군부대에서 나온 지프엔진, 변속기 등의 자동차 부속품을 활용했고, 차체는 드럼통을 잘라 수작업으로 망치를 두들겨 펴서 차량을 열악한 환경의 천막공장에서 제작한 게 시초였다. 이 차종은 1955년 10월 경복궁에서 개최된 산업박람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대한민국 최초의 국산차로, 시발이라는 모델 명칭은 처음 시작한다는 뜻인 ‘시발점’에서 유래됐다.

이 차의 국산 부품 비율은 50%로 알려졌고, 최고 시속 80㎞ 주행이 가능한 지프타입 자동차로 알려졌다. 이 차종은 1962년까지 판매됐고, 이후 일본 닛산자동차와 기술 제휴한 ‘새나라자동차공업㈜’는 자사 차종인 ‘새나라’ 자동차를 생산 판매했다.

대형 상용차 생산의 경우 1954년 ‘하동환 자동차제작소’라고 하는 버스제작 전문회사가 1960년대까지 버스를 대량 생산해 국내에서 버스제조사로 큰 성장을 이뤘다. 1967년 8월에는 베트남으로 버스 20대를 수출하고, 1984년 9월 미국시장에 고속버스를 수출했다.

하동환자동차는 우여곡절 끝에 1986년 11월 쌍용그룹에 인수돼 1988년 3월 쌍용자동차㈜로 상호를 변경하고 최대 히트작인 대형승용차 체어맨과 SUV 렉스톤, 뉴카이런, 코란도 등을 생산하다가 경영난으로 대우그룹에 인수됐다. 하지만 대우그룹 부도로 2004년 대우그룹에서 분리됐으며, 2004년 10월 중국 상하이자동차로 매각됐다. 또다시 2011년 3월 인도의 대표적인 유틸리티 차량 제조회사인 마힌드라&마힌드라(Mahindra&Mahindra Limited)가 쌍용차동차를 인수했고, 2014년 생산된 뉴코란도C는 대한민국 그린카 어워드를 수상했다. 또한 2018년 출시된 소형 SUV인 티볼리가 올해의 SUV로 선정돼 인기리에 판매됐고, 최근 전기차 코란도 E-모션이 출시돼 판매중이다.

이 회사의 2021년 기준 매출액은 2조 4293억원, 당기순이익은 2579억원, 자산총액은 1조8630억원, 자본금은 7492억원, 종업원은 4517명 정도이다.

또한 승용차 시장의 경우 신진공업이 1965년 11월에 새나라자동차공업㈜를 인수하면서 회사명도 ‘신진자동차㈜’로 변경했다. 신진자동차는 일본 도요다자동차와 기술제휴 계약을 통해 ‘코로나’라는 승용차를 생산 판매했다. 당시 ‘코로나’ 차종은 라디오와 히터가 탑재돼 국내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1964년 호남연고 기업가인 문인환은, 프랑스의 Simca 등과 차관 협정을 맺고 ‘아세아자동차’를 설립해 광주광역시에 자동차공장을 건설하고 1970년부터 ‘피아트124’라고 불리는 1200cc급 소형승용차를 라이선스로 생산 판매했다.

당시 피아트124 차종은 깔끔한 디자인에 뛰어난 품질, 경제성 등을 앞세워서 자동차시장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피아트와 라이선스 연장계약 문제로 큰 마찰을 빚었고, 이런 이유로 국내 자동차시장에서 높은 인기도에도 불구하고 3년 만에 차종이 단종됐으며, 그 기간에 피아트124 자동차는 6800여대를 판매했고 현재는 2대 정도가 남아 있다고 한다.

아세아자동차 피아트124는 현대 코티나, 신진 코로나 등과 더불어 1970년대 태동기였던 대한민국 중형자동차 시대를 열었다. 또한 아세아자동차를 인수한 기아산업은 정부정책 권장에 따라 1974년 10월 소형차종인 ‘브리사’를 생산 판매했다.

브리사는 배기량 985cc로 국산엔진을 탑재했고, 1975년 국산화율이 80% 정도로 국산엔진을 탑재한 자동차로 기록되나 독자개발 차종은 아니었다. 현재는 법인이 기아자동차로 흡수됐으나, 자동차 전문가들은 피아트124가 현재 기아가 생산 판매중인 K5의 원조라고도 한다. 여기까지 한국자동차 태동기와 발전과정을 간단하게 살펴봤다.

(정리 = 유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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