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 용인=류지민 기자] 처인성 전투는 몽골군 총사령관 살리타를 사살한 대몽항쟁 기간 중 가장 중요한 승리로 꼽히는 전투 중 하나다. 사진은 1232년 처인성 전투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 ⓒ천지일보 2022.6.12
[천지일보 용인=류지민 기자] 처인성 전투는 몽골군 총사령관 살리타를 사살한 대몽항쟁 기간 중 가장 중요한 승리로 꼽히는 전투 중 하나다. 사진은 1232년 처인성 전투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 ⓒ천지일보 2022.6.12

처인성·처인성역사교육관

처인부곡민, 몽골군에 맞서 싸워

김윤후 승려 지휘로 승리 거둬

군사적·지리적 요충지인 처인성

올해 역사교육관 개관식 진행

가족 단위로 찾아오는 교육관

[천지일보 용인=류지민 기자] 고려시대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군인이 아닌 순수 지역민들이 주축이 돼 몽골군의 총사령관 살리타를 사살함으로써 몽골의 침략을 저지한 대몽항쟁 기간 중 가장 중요한 승리로 꼽히는 전투가 있다.

처인성 전투는 6차례에 걸친 몽골의 고려 침략 중 2차 침략에서 벌어진 전투다.

지난 9일 본지는 고려시대 처인성 전투가 벌어졌던 처인성과 당시 모습을 볼 수 있는 처인성 역사교육관을 방문해 전쟁 당시의 흔적을 좇았다. 이 자리에서 만난 한 시민은 “물론 전쟁이 일어나면 당연히 피 흘리며 싸우겠지만 처인성 전투는 정말 치열하게 싸우며 피 흘린 전쟁 중 하나였다고 한다”며 지인인 해설사를 통해 들었다고 전했다.

◆처인성 전투부터 현재의 용인시까지

1231년 8월 몽골군의 침입으로 개경이 포위되자 고려 정부는 고종이 몽골의 신하로 칭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232년 6월 최우 정권은 비밀리에 도읍을 강화도로 옮겼다. 1232년 8월 몽골군은 강화천도를 명분으로 삼아 다시 고려를 침공했다. 이 과정에서 대구 부인사에 소장돼 있던 ‘초조대장경’을 소실하는 등 내륙지방에 남아 있는 백성들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같은해 12월 백현원 승려였던 김윤후는 몽골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처인성으로 피난하고 처인부곡민과 함께 몽골군과 맞서 싸우기로 했다.

김윤후는 처인성의 지휘자로서 몽골군의 침략 소식에 두려워하는 처인부곡민을 설득하고 용기를 심어줬다. 당시 처인성에는 관군과 중앙군이 파견되지 않았기에 부곡민들과 김윤후가 직접 몽골군과 싸울 수밖에 없었다.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김윤후는 화살로 적장 살리타를 사살했다. 사살당한 살리타를 본 몽골군은 부곡민들에게 포로로 잡히거나 겨우 도망쳐 나왔다. 처인성에서 일어난 전쟁은 경기 남부지역에 대한 몽골군의 침입을 막아냈고 고려를 지켜낸 승리가 됐다. 처인성 전투에서의 승리를 거두자 처인부곡은 처인현으로 승격됐다. 이로 인해 처인부곡민들은 지위가 향상되는 등 신분상 보상을 받았다.

처인현 승격은 처인성 전투 이후 이뤄진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승격 시기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최서묘지명’을 보면 ‘중통 원년(원종 1년, 1260)에 처인현령이 돼 나가고’라고 쓰여 있다. 이 기록으로 봤을 때 1232년에서 1260년 사이 처인부곡이 처인현으로 승격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조선시대 태종 때에 이르러 용구현과 처인현을 용인현으로 통합했고, 용인현은 현재 용인시까지 이어지고 있다.

처인성 전투는 고려 역사상 가장 빛나는 승리라고 평가받고 있다. 전투가 벌어졌던 처인부곡은 남쪽 평택 방면으로 나아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동시에 군량미를 보관하는 창고가 있어 군사적·지리적으로 중요시된 곳이었다.

고려시대 역원제도에 따르면 처인부곡은 광주도(廣州道)에 속했다. 광주도는 남경~용인~죽산~음성~괴산~문경에 이르는 길로 개경에서 광주, 죽주를 거쳐 평택, 안성 방면이나 음죽, 청주 방면의 남쪽으로 이동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따라서 처인성은 교통로는 물론 군창이 있었던 것으로 미뤄 군사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입지를 지니고 있다.

처인성 전투의 승리는 몽골군의 남진공격을 좌절시켰으며 고려 정부가 강화도에 방어체계를 형성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역할을 했다. 아울러 온전히 지역민들이 스스로 일어나 몽골군의 주력부대를 물리치고 승리를 거둔 대몽항전의 승전지로 역사적 가치가 높다.

처인성 전투를 지휘했던 김윤후는 1253년 몽골의 5차 침략에서도 다시 등장하는데, 당시 그는 충주산성 방호별감이었다. 김윤후는 처인성 전투 때와 마찬가지로 지역민들을 단결시켜 몽골군의 공격을 약 70일 동안 막아냈다. 이처럼 김윤후는 대몽항쟁 과정에서 주민들을 독려해 전투에 참여시킨 리더이자 두 차례의 몽골군 침입을 모두 승리로 이끈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인성은 1977년 10월 13일 부곡에도 치소성(治所城)이 있음을 입증해주는 유적이라는 점에서 경기도 기념물 44호로 지정됐다.

백군기 용인시장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지난 3월 28일 용인 처인성역사교육관 개관식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다. (제공: 용인시) ⓒ천지일보 2022.6.12
백군기 용인시장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지난 3월 28일 용인 처인성역사교육관 개관식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다. (제공: 용인시) ⓒ천지일보 2022.6.12

◆몽골 침략 당시 알려주는 교육관

용인시는 지난 3월 28일 처인성 전투의 가치와 의미를 널리 알리고자 처인성 역사교육관 개관식을 열었다. 용인시 처인구 남사읍 아곡리 150-1번지에 지하 1층·지상 2층 규모의 교육관은 1층에 상설전시실과 체험실이, 2층에는 다목적실이 조성됐다.

상설전시실은 신기술을 도입해 기둥 없이 탁 트인 공간으로 구현했다. 이곳에서는 홀로그램, 실감 영상 등을 활용해 처인성 전투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체험실에는 처인성 블록쌓기와 조아용 스케치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백군기 시장은 개관식에서 “처인성역사교육관이 시민들을 위한 역사교육의 장으로 잘 활용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김기준 의장은 “처인성역사교육관의 개관으로 대몽항쟁 전승지인 처인성의 역사적 의의를 널리 알리고 시민에게 애향심과 자긍심을 높여 우리 선조의 얼을 본받는 교육의 장이 될 것이라 기대된다. 앞으로 용인특례시가 역사문화와 문화예술의 도시로 품격을 높여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처인성역사교육관에 방문한 김세린(가명, 여, 용인시 처인구)씨는 “지인이 처인구라는 지명이 예스러운 느낌이 든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며 “예전에는 몰랐는데 지금은 용인이 되기까지 어떤 역사를 거쳤는지 알 수 있었다”고 했다.

이어 “몽골군과 싸웠던 당시 상황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게 일반적인 박물관에서 보여주는 방식과는 달라서 색다른 느낌이었다”고 덧붙였다.

한편 처인성 역사교육관은 정식 개관한 지 한 달 만에 누적 방문객 1만명을 돌파했다. 대체로 가족 단위 방문객이 오는 교육관에서는 블록쌓기와 조아용 스케치는 물론 주말과 공휴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진행하는 민속놀이 체험도 할 수 있다. 민속놀이 체험에서는 투호, 제기차기, 딱지치기, 대형 윷놀이 등을 할 수 있다.

용인시 관계자는 “용인 처인성 역사교육관이 시민들이 언제든 방문해 배우고 즐기고 쉴 수 있는 문화와 휴식의 공간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겠다”며 “양질의 교육프로그램을 확대하겠다”고 말했다.

이처럼 가족과 나들이하며 고려시대 역사를 간접적으로 느끼고 싶다면 처인성 주변을 걷다가 처인성 역사교육관에 가보는 걸 추천한다.

처인성 전경. (제공: 문화재청) ⓒ천지일보 2022.6.12
처인성 전경. (제공: 문화재청) ⓒ천지일보 2022.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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