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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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는 한국인이 즐겨먹는 음식 가운데 하나다. 결혼식에는 하객 접대용으로 등장했다. 미혼 남녀에게 ‘국수 언제 주냐’라고 묻는 말은 시집, 장가 언제 가느냐는 질문으로 통한다.

시골 혼례가 치러지는 잔칫집엔 국수 인심이 후했다. 온 동네 어린아이들까지 국수잔치를 벌였으며 지나가는 행인, 각설이패들도 몰려 함께 먹었다. 필자는 초등학교 시절 동네 친척 형의 결혼식에서 먹은 국수와 콩나물의 향기로움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결혼식 날 국수를 대접하는 것은 신랑 신부의 인연이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기원하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잔치 날 국수가 으레 나옴으로 해서 ‘잔치국수’라는 별칭을 얻게 됐다.

우리 민속에 생일날이면 한 끼는 꼭 국수를 먹었다. 국수를 먹어야 면발처럼 길게 장수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국수’라는 말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한자어인 ‘麴鬚(국수)’가 원형이라는 설이 있다. 즉 한자 ‘누룩 국, 턱수염 수’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누룩처럼 반죽을 둥그렇고 넓게 펴서 수염처럼 잘라 만드는 요리라는 뜻이다.

또 고려시대에 메밀(穀)로 면을 만들어 김치 국물(水)에 담가 먹었다고 전해지는 곡수(穀水)가 국수로 바뀐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전국을 떠돌아다니던 김삿갓이 세상의 몰인정을 비판한 한시에는 국수를 가을 국화에 비유해 ‘국수(菊水)’라고 표기하기도 했다.

12세기 초반 송나라 서긍은 개경에 도착해 고려 음식문화를 체험했다. 그가 돌아가 쓴 ‘고려도경’에도 국수에 대한 기록들이 있다. 이때는 외국 사신들을 접대하는 음식 중에서 가장 귀한 것으로 국수를 꼽았던 모양이다.

서긍은 ‘고려국수가 맛이 있다’고 소감을 기록했는데 요즈음 밀가루로 만든 것이 아니고 메밀국수였던 것으로 상정된다.

국수는 매우 귀했다. 조선 중종 대 재미난 일화가 전한다. 임금의 사위였던 송인(1517∼1584년)이 부친인 철원부사를 만나러 강원도로 떠나는데 교시를 내렸다.

임금은 강원감사에게 ‘송인을 위해 먹을 것을 내놓을 때 국수와 떡은 지급해서는 안 된다. 이런 것은 모두 백성들의 피땀에서 나온 것이다. 내놓지 않도록 하라.’ 국수와 떡을 대접한다는 것은 백성들의 노고에 반한 것이니 국수대접을 엄금한 것이다.

지난주 윤석열 대통령이 대통령실 집무실 근처 국수집을 찾아 식사한 것이 언론에 보도됐다. 그런데 국수집 할머니가 오랫동안 가난한 이들에게 온정으로 국수를 대접한 것이 화제가 되고 있다.

할머니는 1998년 노숙자로 추정되는 한 남성에게 2000원짜리 국수 한 그릇을 말아줬다. 노숙자는 시장한 나머지 급하게 한 그릇을 해치웠다. 이를 딱하게 여긴 할머니는 한 그릇을 더 말아줬다.

허겁지겁 두 그릇을 모두 비운 남성은 가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국수 값이 없었던 것이다. 이 모습을 본 할머니는 ‘그냥 가, 뛰지 말어. 다쳐요’라고 외쳤다.

이 남성은 10년 뒤 방송을 통해 국숫집이 화제가 되자 제작진에게 할머니에 대해 감사 편지를 보냈다. 당시 그는 사기를 당해 전 재산과 가족을 잃은 상황이었다. 그가 극단적인 선택의 기로에서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할머니의 국숫집이었다. 할머니의 인정으로 그는 마음을 달리 먹었다고 한다. 재기에 성공한 그는 ‘주인 할머니는 세상을 원망하던 나에게 삶의 희망과 용기를 준 분’이라고 했다.

대통령의 용산 국수집 오찬은 서민들의 삶을 대하는 행보로서 인상적이다. 서민들과 함께한다는 마음이 앞으로 임기동안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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