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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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2월 8일 밤, 일본 해군은 중국 여순항에 있는 러시아 극동 함대를 기습공격했다. 이날 일본 함대는 인천 제물포에 정박한 두 척의 러시아 전함도 기습공격했다. 오후 4시경 카레예츠호가 자폭했고, 6시경 바라크 호가 침몰했다.

2월 9일에 일본군 1천명이 서울에 들어왔다. 사람들은 도망치고 구중궁궐도 텅 비었으며 조정 대신들도 숨기에 바빴다. 12일에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가 서울을 떠났다.

이러자 일본 공사 하야시 곤노스케는 고종을 위협해 2월 23일에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한일의정서 체결과정을 살펴보자. 1903년 10월부터 하야시는 대한제국 정부 고관들의 협조가 필수적이라 생각하고 고종의 독단적 정국 운영에 불만을 품고 있던 외부대신 서리 이지용과 군부대신 민영철, 이근택 등을 포섭했다. 이지용 등은 이용익 등 고종 측근세력의 반대를 무마하기 위해 로비 자금 1만원(현시가 13억원)을 일본 측에 요구해 돈까지 받았다.

1904년 2월 12일에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가 철수해버리자 하야시는 고종에게 조약 체결을 압박했다. 2월 13일에 고종은 외부대신 서리 이지용(이최응의 손자, 고종의 조카)을 일본 공사관에 보내 교섭하도록 했다. 그러나 친러파 이용익은 일본과 조약을 체결했다가 나중에 러시아가 승리하면 곧바로 대한제국 병탄의 이유가 된다면서 강력 반대했다.

이용익은 2월 22일에도 이지용을 찾아가 만일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면 대역죄인으로 처벌받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이지용은 후환이 두려워 조인을 거부하고 싶었지만, 그럴 경우 하야시로부터 받은 로비 자금이 문제가 될 판이었다. 이러자 일본은 즉각 이용익을 전격 납치해 일본으로 압송했고, 육군참장 이학균과 육군참령 현상건 등을 연금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이지용은 2월 23일 아침에 서울 밖으로 도주하려 했다. 하야시는 이지용의 도주를 저지하고 전문 6조의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조인에 성공했다. 이로써 제1조의 ‘시정(施政)개선 충고’에 따라 일본의 내정 간섭 근거가 마련됐고, 제4조에 따라 일본 군대 주둔의 길이 열렸다.

한일의정서 선포 후 영국의 ‘런던타임즈’는 이렇게 논평했다.

“한국이 이 조약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영구히 일본의 속국이 됐다. 지금부터 일본에 있어서 한국은 마치 우리 영국에 있어서의 이집트와 같다.… 한국의 독립은 형식적인 독립이다.”

이윽고 3월 17일에 메이지 천황의 특파 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서울에 왔다. 이토는 3월 18일과 20일, 25일에 고종을 면담했다. 그런데 ‘고종실록’엔 “고종은 조령(詔令)을 내려 3월 20일에 일본 공사 하야시 등 일본 공사관 직원 전원에게, 3월 24일에는 이토 히로부미와 수행원 모두에게 훈장을 수여했다”고 수록돼 있다.

한편 3월 31일에 민영환은 영국공사 조던에게 이토의 방문에 대해 설명했고, 조던은 즉시 영국 외무성에 보고했다.

“이토는 일본 천황 국서를 직접 고종에게 전달해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그리고 이토는 고종에게 천황 선물이라고 30만엔(현시가 375억원)을 줬고, 궁중 참석자에게도 50만엔을 나눠줬다. 또한 경부선 이익금 일부와 경의선 이익금까지 보장하는 등 고종의 환심을 사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박종인 지음, 매국노 고종, 2020, p 332-333, 구대열, 다모클레스의 칼?, 정성화 외, 러일전쟁과 동북아의 변화, 2005,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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