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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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프 숄츠(Olaf Scholz) 신임 독일 총리가 8일(현지시간)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의 뒤를 이어 독일연방 9대 총리로서의 공식 임기를 시작했다. 숄츠 정부는 사민당(SPD)과 녹색당, 자민당(FDP)이 손을 잡은 ‘3당 연립정부’다. 정당의 칼라로 본다면 빨강(사민당)과 초록(녹색당), 노랑(자민당)이 연대했으니 흔히들 ‘신호등 연정’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로써 기민당의 메르켈 시대는 16년 만에 막을 내리고, 1998년 슈뢰더 총리 이후 23년 만에 사민당 중심으로 정권이 교체된 것이다.

앞서 독일 연방하원은 본회의를 열고 재적 의원 736명 중 707명이 참여한 표결에서 395명이 찬성해 중도좌파의 사민당 숄츠 총리 후보를 제9대 총리로 공식 선출했다. 이날 본회의장 참관석에 있던 메르켈 전 총리도 숄츠 총리 시대의 개막을 축하했다. 숄츠 신임 총리도 메르켈 전 총리를 향해 “이 나라를 위해 큰 업적을 남겼다”며 큰 박수를 보냈다. 사실 숄츠 총리는 지난 2017년 총선 이후 메르켈 정부의 ‘대연정’ 시기에 기민당을 대표해서 부총리 겸 재무장관을 맡아 이번 총선 직전까지 메르켈 전 총리와 함께 일해 왔다. 숄츠 역시 메르켈 정부의 핵심 각료였다는 뜻이다.

이처럼 기민당이 사민당과 대연정으로 국정을 이끌기도 하고 또 총선 결과에 따라서는 대연정의 한 축인 사민당이 다른 정당과 연합함으로써 정권을 ‘교체’하는 효과를 만들기도 한다. 이와 같은 ‘정치의 유연성’이야말로 시대적 변화와 국민적 요구에 능동적으로 화답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독일정치의 힘’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제든 국민적 요구가 확인된다면 어느 정당과도 손을 잡아서 ‘연합정부’를 꾸릴 수 있는 정치의 유연성은 독일의 선거제도와 다당제 전통이 만난 결과이며 여기에 민주주의를 향한 독일 국민의 수준 높은 정치의식이 뒷받침 되면서 구축된 성과라 하겠다. ‘죽기 아니면 살기 식’의 ‘진영 간 대결 정치’가 살벌하게 펼쳐지고 있는 우리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연립정부’는 그저 단순하게 여러 정당들이 총선 결과에 따라 이당 저당과 손을 잡아서 정권을 세운다는 의미 그 이상의 것이다. 연립정부의 가장 큰 힘은 어느 정당과도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정당 간 상호 존중과 상호 협력이라는 대전제가 깔려있다. 상대 정당을 향한 무차별적인 비난과 공세는 꿈도 꾸기 어렵다. 독일 기민당이 직전까지는 사민당과 손을 잡았지만 이번엔 사민당이 자민당과 손을 잡았다. 서로 ‘다른 것’ 보다는 ‘같은 것’을 먼저 찾을 수밖에 없는 ‘공생의 원칙’이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에서 독일정치는 유연하며 동시에 안정적이다. 끊임없이 차별성을 부각시키며 상대방을 비난하고 음해하면서 국민의 지지를 얻어내는 한국정치의 풍토에서는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독일정치의 힘은 오늘날 독일의 국제적 위상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통일국가를 이룬 지 불과 한 세대 만에 독일은 유럽의 최강자로, 그리고 유럽을 대표하는 글로벌 리더 국가로서 굳건하게 자리매김했다. 이는 메르켈 정부 16년 최고의 업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이다. 정치와 외교, 경제, 사회 등 그동안 독일의 전진은 참으로 엄청났다. 이에 따라 메르켈 전 총리를 떠나보내는 독일의 언론과 여론을 보노라면 한마디로 ‘감동’이다. 고맙고 또 ‘위대했다’는 찬사가 곳곳에서 쏟아졌다. 사실상 정권이 교체된 것이지만 정말로 그런 것인지 헷갈릴 정도다. 독일 국민이 보내는 이 모든 갈채의 내면에는 바로 정치의 영역, 특히 연합정치가 유연한 ‘독일정치의 힘’이 깊숙이 깔려 있음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핵심은 곧 정치에 있다’는 말이 오늘날 독일의 번영을 바라보는 핵심 키워드가 아닐까 싶다.

메르켈 이후의 숄츠 정부는 사실상 정권을 교체한 만큼 외교와 경제, 복지 등에서 적잖은 변화를 시도할 것이다. 독일 사민당은 중도 개혁성이 강하지만 숄츠 총리는 보수에 가깝다. 게다가 연정의 대상인 사민당과 녹색당의 성향을 염두에 둔다면 생각보다 더 보수성을 강화할 가능성이 높다. 과연 보수성 강한 정책기조를 독일 국민이 어떻게 평가할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코로나19 대책이나 에너지 정책 등도 시급하지만 당장 미국을 비롯해 러시아, 중국 등과의 글로벌 파워게임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도 궁금한 대목이다. 이에 따라 지난 총선에서 제1당으로 올라선 사민당이 20년 넘게 잃어버렸던 집권당의 위상을 더 굳건하게 구축해 나갈 수 있을지, 아니면 여론으로부터 다시 밀려 날지는 이제 막 거친 바다를 향해 출항한 ‘숄츠 호(號)’가 답할 몫이다.

숄츠 호에 탑승한 각료들 가운데 절반인 8명이 여성이라는 점도 인상적이다. 이런 대목에서도 독일정치의 힘을 볼 수 있을뿐더러 특히 연립정부의 강점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고무적이다. 딱히 여성 각료가 많아서가 아니다. 대화와 협력, 존중과 공존의 가치가 독일정치의 저변에 자연스럽게 구축되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막말과 독설, 음해와 모략, 무차별적인 정치공세와 고소·고발이 난무하는 한국정치의 현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점에서도 우리에겐 부럽고도 아픈 대목이다. 이명박, 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은 감옥에 있다. 앞으로 이재명, 윤석열 두 대선후보의 운명도 불안하다. 문재인 대통령도 알 수 없다. 한국정치의 ‘진영 대결’이 빚어내는 비극의 연속인 셈이다. 과연 이것이 정치영역만의 비극일까. 그것은 고스란히 국민 모두의 비극이다. 떠나는 메르켈 전 총리의 마지막 발언마저 더 부럽게 다가온다. 메르켈 전 총리는 마지막 대국민 팟캐스트에서 ‘코로나19 위기’가 계속되고 있다며 꼭 백신을 맞으라고 호소했다고 했다. 그리고 퇴임 후 계획에 대해서도 아무런 계획이 없다며 “당분간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자며 시간을 보내겠다”고 했다. 독일정치의 힘, 연립정부의 매력을 우리도 빨리 따라 잡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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