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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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사회주의 체제에서 수령의 개념은 복수의 지도자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레닌은 이 점에서 사회주의 집단지도체제와 그 리더들을 모두 수령으로 불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철저한 개인숭배로 자신만을 수령으로 호칭하도록 수령론을 변질시켰다. 스탈린주의를 모방한 김일성 역시 1960년대 중반부터 유일적 영도체계를 혁명적 수령론과 배합해 사용했다. 그러나 김정일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수령으로 부르는 것을 금기시했다. 이른바 충효사상을 내세우며 선대수령만을 숭배하도록 제도화했다. 그런데 최근 북한 관영매체가 김 위원장을 ‘수령’으로 지칭하고 나서 주목을 끌고 있다.

노동신문은 11월 11일 ‘위대한 수령을 높이 모신 인민의 강용한 기상을 만천하에 떨치자’ 기사에서 김 위원장을 ‘인민적 수령’ ‘혁명의 수령’으로 불렀다. 이날 논설에서는 “김정은 동지는 인민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열화 같은 사랑을 지니시고 희생적 헌신으로 사회주의 위업을 빛나는 승리로 이끄시는 위대한 수령”이라고 강조했다. 신문은 전날 논설을 통해서도 “김정은 동지를 수령으로 높이 모신 것은 우리 인민이 받아 안은 최상 최대의 특전이며 대행운”이라며 치켜세웠다. 북한에서 ‘영원한 수령’은 김 위원장의 할아버지 김일성, ‘영원한 총비서’는 김정일을 가리키는 고유 호칭이다.

김 위원장은 2021년 1월 노동당 제8차 당 대회 때 ‘노동당 총비서’로 추대됐다. 김정일 자리라며 비워놓았던 총비서 자리에 오른 데 이어 이제는 김일성과 같은 반열에 올랐음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이 확고한 정치적 위상을 확보했음을 보여준다. 북한은 올해 1월부터 김 위원장의 대외 직함 영문 표기도 ‘체어맨(chairman·위원장)’ 대신 김일성 때처럼 ‘프레지던트(president·대통령)’로 바꿨다. 지난 2013년 12월 고모부이자 당시 권력 실세 중 실세였던 장성택 행정부장을 숙청하는 등 권력 장악을 본격화한 김 위원장은 5년 전인 2016년 36년 만에 노동당 7차 대회를 열고 헌법을 개정해 국방위원회를 폐지하면서 ‘선군정치’ 간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김 위원장이 권력 안정화를 위해 당·정·군 주요 간부에 대한 숙청을 이어가자 두려움을 느낀 권력 엘리트들이 잇따라 탈북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김 위원장이 통치에 더욱 자신감을 표출하기 시작한 것은 2017년 11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5형 시험발사 성공 이후부터다.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김정은은 대북 제재를 풀고 경제난을 탈피하려는 목적으로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과 협상을 시도한다. 이 시기 김 위원장의 대형 초상화가 평양공항에 걸리는 등 김 위원장 1인 우상화가 본격화됐다. 북한사에서 반미가 친미로 바뀌는 듯한 이와 같은 파격적 외교는 김정은만이 해 낼 수 과감한 ‘외교개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자신감의 바탕 위에서 최근 북한은 수령 호칭에 이어 ‘김정은주의’까지 들고 나왔다. 김일성주의 김정일주의에 이은 이른바 3김주의가 탄생한 것이다.

김정은주의의 탄생은 김 위원장이 선대 그늘에서 벗어나 홀로서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 위원장은 김정일 사망 이후 100일간의 추모 기간이 끝나자 2012년 4월 4차 당 대표자회를 열고 “노동당의 지도사상은 김일성-김정일주의”라고 강조하며 선대의 후광에 기대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2015년 김 위원장의 신년사부터 김일성, 김정일에 대한 표현이 줄어들며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올해 1월 변경한 새 노동당 규약에서는 이례적으로 김일성과 김정일 이름을 주어로 한 문장이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았다. 김정은주의의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우리 국가 제일주의’와 ‘인민 대중 제일주의’가 핵심 토대를 이룰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우리 국가 제일주의는 군과 강한 국방력을 중시하던 선군정치에서 벗어나 나라의 전반적 국력을 강조하는 것이다. 인민 대중 제일주의는 북한 주민들의 이익과 편의를 최우선시하며 실질적 생활 수준을 향상한다는 사상이다. 쉽게 해석하자면 김정은주의는 북한의 새로운 통치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허구에 지나지 않음은 모두가 공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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