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실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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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동이 지난 지 한참 지났고 초겨울에 들어서게 되니 늦가을까지만 해도 동네 숲길에서 요란하게 들려오던 귀뚜라미 울음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가을 정취를 물씬 나게 했던 풀벌레였는데, 계절의 변화 앞에서는 속수무책인가 보다. 잠시 그 생각을 하다가 언젠가 어느 지인이 귀뚜라미에 관해 들려준 이야기가 갑자기 떠올랐고 또 재미가 있어서 글머리에 화두로 삼아본다. “귀뚜라미가 왜 그렇게 우느냐”는 것인데, 그의 명쾌한 자문자답은 이렇다.

귀뚜라미가 소리 내 울지 않으면 그 작은 풀벌레가 어디에 있는지 사람들이 모른다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기 위해 오랜 시간을 그토록 처량하게 운다는 것이었는데,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럴듯해 수긍이 간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고 존재성을 인식시키는 욕망이 인간에게만 있는 줄 알았지만 작은 미물에게도 있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던 것이다. 한낱 미물도 그러거늘 정치시즌을 맞아 말로 먹고산다는 정치인들은 오죽하겠는가.

정당들이 대선 체제 준비기로 돌입하면서 더불어민주당, 국민의힘 등 정당과 대선 후보들, 그리고 당 캠프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논평을 쏟아내거나 후보 자신에게 유리한 국면이 전개되도록 하기 위해 정치인들이 안간힘을 쓰는 현상황이다. 대체적으로 본다면 정치인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기 위해 무진 애를 쓰는바, 대선 주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대부분 정치인들이 유권자의 표심을 먹고 살자니 달리 방도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공약이나 의정활동 실적을 지역구 주민에게 알리고 언론 등과 인터뷰하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대구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지인 한 사람이 “대구는 야성이 강한 도시로도 유명하지만 의리를 매우 중시하는 지역”이라 말했다. 국민의힘 경선 과정과 현재의 이런저런 상황을 언급하다가 나온 말이기에 그 말이 무엇을, 또 누구를 지칭하는지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지난 국민의힘 대선 후보 선출 당시 “결과를 깨끗이 승복한다. 정권교체의 밀알이 되겠다”고 공언했던 홍준표, 유승민 두 경선 후보에 대한 비판과 질책이 아닌가 짐작된다.

유 전 의원은 경선 후 두문불출한 상태이고, 홍준표 의원은 초심과는 달리 사사건건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를 비판하고 있으니 의리를 중시하는 대구사람의 정서에 맞느냐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유 전 의원은 경선기간 내내 의리를 배반한 ‘배신자 프레임’에 갇혀 곤혹을 치르기도 했고, 홍 의원은 경선기간 동안 이번이 대선 출마 마지막 기회라고 했지만 경선에서 2위를 했다고 차차기(?)를 준비한다는 등 말이 들리기도 하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결과적으로 정치인이 식언(食言)한 것이다.

정치인이 이미 뱉은 말을 되돌리는 식언이나 정계은퇴 후 복귀는 국민동의가 없는 한 어려운 일이다. 과거 YS나 DJ 같이 오랫동안 국민의 신망을 받아오던 정치적 거목들이 정계 은퇴 후 번복하고 정치계에 화려하게 복귀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국가권력에 의해 강제로 정계은퇴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고, 어쩔 수 없이 정계 은퇴를 한 정치 거목이었던 것이다. 홍 의원과는 상황과 사정이 다르다.

아닌 게 아니라 홍준표 의원의 과거 막말은 DK 지역에서는 이미 소문(?) 나 있다. 19대 자유한국당 당대표로서 대선후보에 올랐던 그는 과거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 상실, 국회 특활비 유용, 돼지발정제 언급문제 등과 함께 바른정당을 겨냥해 ‘첩’라고 표현해 ‘여성비하 발언’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다. 당시 하태경 의원은 “홍준표 대표는 하루도 막말 안하면 입안에 가시가 돋느냐. 입만 열면 시궁창 냄새가 진동한다”며 그를 저격하기도 했다. 그가 자유한국당 당대표로 있을 때 “박근혜 전 대통령을 축출한다”고 선언해 국민빈축을 사기도 했던 정치인이다.

칼럼 첫머리서 언급했지만 귀뚜라미 같은 작은 미물도 가을 내내 자신의 존재감을 발산시키기 위해 처량하게 우는 것이니 정치인도 활동하지 않으면 쉽게 잊혀지게 마련이다. 5년 후에는 국내 정치환경, 경제환경 등 많은 것들이 달라질 것이다. 그럼에도 경선과정에서 젊은 층의 지지가 좀 높았다고 해서 소속정당과는 엇박자로 가면서 독자 행보를 보이고 있는 홍 의원을 바라보는 TK 지역민들의 시선은 곱지만은 않다. 지역구를 대구에 둔 만큼, 홍 의원이 생물(生物)같은 정치판에서 앞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는 산전수전을 다 겪어 본 자신이 더 잘 알 수 있을 터, 화합·협력의 정치판에서 독불장군의 설 자리는 영원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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