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실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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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해요, 이 순간이 다 지나고/ 다시 보게 되는 그날/ 모든 걸 버리고 그대 곁에 서서/ 남은 길을 가리란 걸// 인연이라고 하죠, 거부할 수가 없죠/ 내 생애 이처럼 아름다운 날 또 다시 올 수 있을까요/ 고달픈 삶의 길에 당신은 선물인 걸/ 이 사랑이 녹슬지 않도록 늘 닦아 비출게요// (후략).’ 가사가 유달리 아름다운 노래 ‘인연’을 가수 이선희 씨가 2009년 2월경 선을 보여 한 때 이 노래는 공전의 히트를 쳤다.

‘인연(因緣)’이란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이다. 통상적으로 인연은 이선희 씨의 노래처럼 남녀 간 내용이 주류를 이루는바, 연인 사이에서 관계되는 경우가 많다. 학창시절 국어교과서에 ‘인연’을 소재로 한 수필이 있었다. 내용인즉 동경에서 유학하던 시절 두 남녀관계의 이야기로 서로 연분이 싹텄지만 청년이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는 바람에 헤어진 뒤 오랫동안 만나지를 못했다. 무수한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 첫사랑의 여성을 만나보니 젊은 시절 청초한 모습은 온데간데가 없고, 만남 자체를 후회했다는 순애보 같은 스토리다. 차라리 재회하지 않았더라면 유학 당시 그 좋은 모습의 인연을 두고두고 간직할 수 있을 거라는 아쉬움이 담겨있다.

이처럼 인연은 일반적으로 남녀 간 관계로 이해되고 있지만 남성 간 좋은 인연도 비일비재하다. 나에게도 소중한 인연이 있다. 벌써 안지가 20년 넘은 지인으로 지금도 변함없이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대구가 고향인 그는 제주에 사업체를 가지고 있는데 사업하는 사람치고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사람이다. 고향이 아닌 곳에서 20여년 살면서 많은 사람들과 두루 사귀었으니 현지인들과도 스스럼없이 호형호제하고 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이 “사업자라기보다는 사회사업자”같다고 평가했으니 그의 대인관계가 어떤지 잘 나타나고 있는 대목이다.

김동주 회장은 나보다 5살이나 적다. 고향 후배가 되기도 하는데 그쯤 되면 내가 동생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테지만 그를 꼭 김 회장이라 부른다. 거기에는 그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사람 사귐에 있어 여러 가지를 가리지 않고 모든 지인들에게 잘해 주고 있으니 그게 그의 장점이다. 사업한다고 해서 인간관계에서도 이익만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하겠지만 내가 알기로는 대체적으로 사업가는 상대방이 자신에게 사업상 이익 되는 점이 없을 경우 점차 소원하게 되고 그러다가 끝내 연락이 두절되니 그게 그들의 또 하나의 장점(?)이라면 장점이다. 그럼에도 김 회장은 20년 동안 교류를 이어가면서 정성을 쏟고 있으니 그야말로 존경할만하다.

최근 나는 김 회장과 함께 만든 좋은 추억들이 많다. 명절 때마다 안부를 묻는 것은 물론이고 또 어떤 때는 잊지 않고 제주도로 초청해 이곳저곳을 구경 다니며 상세하게 설명해 주고, 맛난 음식점에도 데리고 가서 제주 별미를 맛보게 해준다. 대접받았다고 하여 그에 혹해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정말 못난 사람의 짓이다. 누구라도 사회생활을 오래 하고 또 대인관계에서 산전수전을 겪어보면 나름대로 느껴지는 게 있다. 내가 김 회장을 위해 해준 일도 없는데, 그는 나를 형님이라 부르며 그 오랜 세월 동안 온갖 정을 주고 있으니 때로는 미안스럽기도 하다. 늘 좋은 인성의 그에게서 마치 아가페 사랑을 보는 것 같으니 그의 진면목이다. 그것이 좋은 인연이자 소중한 인연이지 자신에게 잘해준다고 혹해 그를 호평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가족 친지가 아니면서도 한결같은 정을 베푸는 경우는 세상에서 그리 흔하지 않으리라.

아내나 형제자매, 친지들은 당연히 소중한 사람들이다. 고향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며 추억을 쌓고 외지생활에서 혹 외로울 때나 궂은일이 있을 때 만나서 도시의 골목 포장마차에서 감꽃 줍던 기억을 되살리며 도란도란 이야기할 수 있는 고향친구도 지란지교(芝蘭之交)이다. 또 그밖에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동안 깊이 사귄, 앞에서 사례를 든 김 회장 같은 분도 좋은 인연을 가져다주는 고마운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이 많다면 우리사회는 한층 더 밝아질 것이다.

끄트머리에서 또 하나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필자가 천지일보와 좋은 인연을 맺고 본지 ‘정라곤의 아침평론’에 2013년 2월 8일 자 ‘좋은 세상의 시작!’을 쓴지도 8년 10월이 넘었다. 글솜씨는 비록 없었지만 그동안 사회전반에 걸친 현상 등에 관해 나름대로는 치열하게 글을 썼다. 그로 인해 애독자들의 사랑도 많이 받았으니 분에 넘치고, 마지막 평론을 쓰는 이 순간에도 마음이 가볍다. 이제 개인적 사정으로 ‘정라곤의 아침평론’을 접으려니 내게는 아쉬운 게 너무나 크다. 9년 가까이 부족한 글을 애독해주신 천지일보 구독자에게 거듭 감사드린다. 평론 연재 449회가 쉬운 건 아니지만 전적으로 믿어주는 신문사가 있고 애독자가 있어 행복했던 세월이다. 세상에는 신문사와 김 회장 같은 ‘좋은 인연’들이 있기에 외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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