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스포츠 칼럼니스트·스포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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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런던올림픽은 남녀 종목수가 동수를 이룬 역사적인 대회였다. 종목 뿐 아니라 참가 선수수도 비슷해지며 사실상 올림픽에선 남녀평등이 실현됐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올림픽만 갖고는 스포츠에서 완전 남녀평등이 됐다고 말 할 수 없는 모양이다.

최근 국제빙상연맹(ISU)은 여성을 가리키는 용어로 ‘숙녀(Ladies)’ 대신 ‘여자(Women)’로 쓰기로 결정했다. ISU의 이번 결정으로 앞으로 세계빙상무대에선 숙녀라는 말이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ISU가 숙녀라는 단어를 대체하기로 한 것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권고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그동안 ISU는 부적절한 남녀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예를 들면 피겨스케이팅 남자 싱글을 ‘Men’s Singles’로, 여자 싱글은 ‘Ladies’s Singles’로 표기했다. 남자는 단어 그대로 표기하면서 여자는 여성성을 강조하는 숙녀라는 말로 나타난 것이다. 여자를 ‘Ladies’로 표기했다면 남자를 ‘신사(Gentleman)’로 표기했어야 했는데 지금까지의 방식은 남녀 명칭에 분명한 차이를 두고 있었다.

신사나 숙녀는 남녀를 정중하게 표현하는 말이다. 영국 영어에서 출발한 말로 추정되는데 각종 모임 등에서 ‘Lady and Gentleman’이라고 호칭을 붙여 첫 말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숙녀를 먼저 말함으로써 여성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의미하는 뜻으로 활용됐다. 청소년들을 얘기할 때 ‘Boys and Girls’를 먼저 말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하지만 ‘Lady and Gentleman’도 성적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최근에는 가급적 자제하는 분위기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고 있다.

원래 ‘Women’이라는 말은 ‘남자에게서 나왔다(Out Of Men)’는 의미이다. ‘Women’은 ‘Woman’의 복수형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Woman’은 고대 영어 ‘Wifmann’과 ‘Wumann’을 거쳐 현재의 말로 발전했다. 모두 여자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Mann’은 원래 인간을 지칭하는 중립적인 말이었는데 1066년 노르만 왕조가 등장하면서 남자라는 뜻으로 쓰이게 됐다. 이후 ‘Woman’은 남자에게서 나왔다는 뜻으로 통용됐다.

고대 그리스 올림픽에서 여성 출전을 불허하는 등 인류 역사를 통틀어 전통적인 성역할은 남성 위주의 권력 구조를 형성하며 여성의 활동과 기회를 제한해왔다. 20세기 들어 인간의 존엄과 평등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며 많은 사회에서 규제가 느슨해지면서 여성들은 전통적인 주부에서 벗어나 직업과 고등 교육을 추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

하지만 가족 내에서든 공동체에서든 여성에 대한 폭력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주로 남성들에 의해 저질러진 폭력으로 인해 일부 여성은 생식권을 거부당하기도 했다. 성평등을 내세우는 페미니즘의 움직임과 이데올로기가 양성 평등을 달성하는 공통된 목표를 갖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는 1949년에 쓴 그의 대표저서 ‘제2의 성’에서 가부장제가 역사적으로 재생산되며 사회적 규범으로 자리잡은 방식과 과정 속에서 여성을 고정관념화하고 가부장적 사회 조직을 위한 수단으로 ‘사회적 타자’로 만들어 소외시켰다고 주장했다. 보부아르는 이 책을 통해 생물학적 ‘성’과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젠더’를 구분해 한 개인을 여성으로 타자화하는 사회 체제를 개념화했다. 여성을 사회에서 타자화하는 구조가 개선되지 않으면 진정한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 추구가 이뤄질 수 없다는 설명이었다.

ISU가 ‘Women’을 사용하기로 한 것은 선언적 의미 이상의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아직도 성평등이 이루어지지 않고 세계 여러 지역에서는 성불평등의 폐습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 스포츠에서의 노력은 이러한 성불평등을 해소하는 작은 변화에 불과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노력이 조금씩 변화를 일으켜 성평등과 관련해 인류의 편향된 인식을 바로잡는데 귀중한 기회가 됐으면 싶다.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가 아닌 ‘강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인 세상은 얼마든지 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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