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

김왕노(1957 ~  )

그저 우리 벌레가 되자.
풀잎 하나만으로도 호의호식을 하는
물방울 하나가 평생 우물이 되는
더듬이 하나만으로도 서로를
더듬으면 우주에서 가장
찌릿찌릿한 전기가 통해서 까무러치는
명분이고 체면이고 없이
우리 이대로 손잡고 잠들었다가
갑충도 좋지만 푸른 애벌레라도 되자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랑의 괄약근으로 이완과 수축하면
우리의 날개가 돋는 풀잎 끝으로
그저 우리 마른 껍질만 남기고서
푸른 하늘 속으로 들어가서
영영 종적을 감추는 벌레나 되자.

 

[시평]

우리는 흔히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그 반면에 벌레는 미물(微物)이라고 하여 하잖게 생각을 하며, 마음에 조차 두지를 않는다. 풀숲이고 나뭇가지, 땅속 등지에서 다만 꿈틀거리며 살아가는 벌레. 말이 살아가는 것이지, 그 벌레가 과연 목숨이라는 게 있을까, 인간은 관심도 두지 않고 그저 무심하게 지나친다.

그러나 시인은 ‘그저 우리 벌레가 되자’라고 말한다. ‘풀잎 하나만으로도 호의호식을 하는, 물방울 하나가 평생 우물이 되는, 더듬이 하나만으로도 서로를 더듬으면 우주에서 가장 찌릿찌릿한 전기가 통해서 까무러치는’ 그런 벌레가 되자고 한다. 그래서 ‘명분이고 체면이고 없이’ 살아가는 벌레가 되자고 한다.

얼마나 우리네는 ‘명분과 체면’ 때문에, 때때로 힘들고 고단한 삶을 사는가. 명분을 세우기 위하여, 체면을 지키기 위하여, 마음에 내키지도 않는 일을 하며, 때로는 굴욕과 참담함을 견디며 살아간다. 그러나 다만 꿈틀거리기만 하는 벌레는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며, 그것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이 작은 미물, 벌레는 굴욕도 참담함도 없으리라. 삶이란 궁극적으로 모두에게 같은 것이리라. ‘꿈틀거리는 삶’이나 ‘굴욕과 참담함을 견디는 삶’이나.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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