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김가진(金嘉鎭)이 상해에 도착할 당시 75세의 고령이었는데 이러한 망명에 이어서 또 다른 망명 시도가 대동단에 의해 극비리에 추진됐는데 그 배경을 상세히 소개한다.

3.1 운동이 발생한지 6개월 후가 되는 9월에 상해임정에서 활동하는 인물이 경성으로 파견되어 사동궁(寺洞宮)에 있는 의친왕(義親王)의 처남인 김춘기(金春基)를 만나 상해의 정세를 이야기 하고 의친왕을 임정에서 옹립하고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귀족과 신망이 두터운 신하들을 가담시키면 독립은 틀림없을 것으로 설득하니 김춘기는 이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의친왕에게 그러한 제안을 전달했다.

의친왕은 자금만 조달되면 제안을 수락할 의향을 비추었는데, 이러한 소식을 전해들은 김가진과 전협(全協)은 다시 군자금(軍資金)의 모집과 동지규합이 여의치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본부를 상해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상해임정(上海臨政) 내무총장(內務總長) 안창호(安昌浩)에게 편지를 보낸 결과 그는 크게 기뻐하며, 임정의 인사를 경성으로 파견했다.

이 인사를 만난 김가진은 곧 의친왕에게 쪽지를 보냈는데 당시 김가진과 의친왕은 긴밀한 관계였다.

김가진은 다시 김춘기를 통하여 의친왕에게 상해행을 권유한 즉 의친왕은 10만원만 준비하면 상해행을 결심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래서 김가진은 이러한 결과를 전협에게 전달하고 의친왕 망명 문제는 전협을 중심으로 대동단에서 추진하기로 하고 그는 아들 김의한과 안내자인 이종욱과 함께 상해로 망명하였던 것이다.

한편 전협은 10만원이란 거금은 아무래도 조달치 못할 것으로 보고 애초에 최초부터 어업권을 체결하면 의친왕은 반드시 마음을 움직일 것이요, 또한 정운복(鄭雲復)의 마음을 움직이면 일이 쉽게 성사될 것으로 생각하고 이재호(李在浩)로 하여금 정운복을 지나 요리점으로 불러내어 의친왕에게 어업권을 얻기로 하면 3만원을 금주(金主)로부터 받아 내기로 교섭했다.

이와 관련해 이재호는 본래 예천 양반 출신으로서 대한제국 시대에는 기사로 활동했으며, 그 이후 궁내부(宮內府) 시종(侍從)으로도 활동한 관리였는데, 3.1운동 이후 대동단에 가입했다.

정운복은 예전부터 이재호와 친분이 두터워서 이재호의 말이면 무엇이나 믿었는데, 이번 일도 이재호의 말을 믿고 의친왕에게 여러 차례 서면으로 이 일을 교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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