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의친왕(義親王)의 결심을 확인한 전협(全協)은 곧 그를 인력거에 태우고 정운복(鄭雲復)을 결박하고 입에는 재갈을 물리어 역시 인력거에 태워 나창헌(羅昌憲), 김중옥(金中玉)이 이를 호송하였으며, 의친왕을 모시고 온 김삼복(金三福)을 감시하였으며, 뒤를 따라서 결국 그 이튿날 새벽 3시에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구기리 73번지인 최성호(崔成鎬) 집에 이르렀는데 최성호는 양정(楊楨)의 소실(小室)의 형부(兄夫)로서 거사(擧事)의 중간 거점으로 사전에 물색해 둔 곳이었다.

한편 그 전날 밤, 의친왕은 전협에게 “나는 이미 상해로 갈 것을 결심하였으니 숭인동에 있는 수인당(修仁堂) 김흥인(金興仁)과 간호사(看護師) 최효신(崔孝信)을 동행하여 고종황제(高宗皇帝)께서 상해 덕화은행에 예치한 채권증서 1백 2십만원과 기타의 비밀서류를 가죽가방에 넣어 수인당으로 하여금 이것을 가져오게 하고 더불어 이재호(李在浩)에게 편지를 써주며 김춘기(金春基)의 심부름이라 하고 의친왕비(義親王妃)에게 편지를 전하라”하니 이재호는 즉시 그 편지를 가지고 출발하였다.

그래서 수인당이 와서 기다린다고 하여 간동(諫洞)으로 가서 김삼복에게 그 뜻을 수인당에게 전하게 하니 보관하고 있던 가죽가방과 여행용 가방을 가지고 김춘기와 최효신과 같이 간동(諫洞)으로 왔는데 이재호는 김춘기의 동행을 거절하고 수인당과 최효신을 데리고 은평면으로 갔다.

그런데 의친왕이 김흥인과 최효신을 데리고 오라 한 것은 상해에 동행하기 위함이었는데, 여기에 대하여 전협은 많은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는 뜻을 의친왕에게 전하니 결국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김흥인과 최효신을 동행하는 문제는 단념하기로 하였으며, 전협에게 2백원을 받아서 그중에 1백 3십원을 김흥인에게 주어 다시 경성으로 보냈다.

김춘기는 의친왕이 창의문(彰義門) 밖에 위치 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어 동지 1명과 함께 창의문 밖으로 급히 달려간즉 정남용(鄭南用)과 이재호는 김춘기가 자신들의 일을 방해하고자 온 것으로 알고 “의친왕을 상해로 모시고 가 임시정부(臨時政府)에 옹립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들의 큰 거사인데 당신들은 어찌 이러한 계획을 방해하려느냐?” 하면서 김춘기를 쫓아 보냈다.

그날 오후 5시경, 정남용, 한기동(韓基東) 외 한 사람은 의친왕을 모시고 도보로 수색역까지 나와 옷을 갈아입은 다음 11월 11일 오전 11시 관헌의 눈을 피하여 3등차를 타고 다른 동지 한 사람은 관헌의 수사와 경계 상황을 알기 위하여 송세호(宋世浩)가 남대문역에서 3등차를 타서 의친왕을 수행하고, 한기동은 의친왕의 출발상황을 전협에게 알리기 위하여 개성역에서 내렸다.

송세호는 평양에서 관헌의 경계 상항을 탐색하기 위하여 기차에서 내려 다음 차로 가기로 하였고, 정남용과 이을규(李乙奎)는 의친왕과 같이 11월 12일 오전 11시에 무사히 단동(安東)역에 정차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제가 정차 중에 내리는 사람들을 일일이 조사하는 과정에서 의친왕을 수행하던 정남용이 체포되었으며, 이을규는 사전에 눈치를 채고 피신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조사과정에서 의친왕도 그 장엄한 거사를 앞두고 체포되어 경성으로 호송되면서 대동단(大同團)에서 추진하였던 의친왕 상해 망명 추진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한편 단동(安東)역에서 체포되어 경성으로 호송된 의친왕은 조선총독(朝鮮總督) 관저에 있는 녹천정(鹿川亭)에서 50여일 동안 연금되었다가 다시 사동궁으로 돌아왔으며, 그 이후 의친왕에 대한 일경의 감시는 더욱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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