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정운복(鄭雲復)의 여러 차례에 걸친 서면으로 마침내 의친왕(義親王)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이르렀는데, 원래 의친왕의 어장은 부산에 있는 일본인이 어업권을 얻어 어업을 경영했는데 그 수익이 엄청나게 많았다.

그리하여 경남 연안의 어부들은 일본인을 배척하고 그 어업권을 얻고자 서울로 올라와 사동궁(寺東宮)에 있는 의친왕부 사무실(義親王府事務室)을 방문해 청원도 했었고 어떤 사람은 중간에 사람을 넣어 의친왕에게 직접 부탁했으나 일본인과의 계약기간이 끝나지 않아서 어업권을 얻지 못하고 돌아간 일도 많았다.

그러므로 전협(全協)은 의친왕에게 교섭하기를 현 권리자인 일본인과의 계약이 끝나는 대로 그 어업권을 이동하기로 하고 우선 그 어업권을 가지려는 금주(金主)로부터 3만원을 선불하기로 했다.

이와 관련해 전협은 금주(金主)로서 한참판(韓參判)이라는 가공의 인물 행세를 했으며, 윤용주(尹龍周)는 그 대리인(代理人) 이민하(李敏河)로 위장(僞裝)했다.

그러나 이것도 어장을 저당으로 하고 이왕직 사무관(李王職事務官)의 연서를 요하는 등 번거로운 일이 있으므로 어장 문제는 별관계로 하고 3만원을 차용하고 대차기한(貸借期限) 만료 후는 반드시 정식계약서를 교환하기로 하자는 정운복의 통지를 받은 전협은 원래부터 목적이 어장권 문제에 있지 아니하고 오로지 의친왕 망명이 목적이라 그러한 번거로운 수고를 할 필요 없이 차금 형식에 응하기로 하고 정운복에게 1만 5천원을 사례키로 했다.

그러나 1만 5천원은 금주(金主) 한참판이 단 한번이라도 의친왕과 만나서 그에게서 확실한 대답을 듣고 그 자리에서 지불하겠다고 했다.

정운복은 이 말을 확신하고 1919년 11월 8일 의친왕에게 이러한 사실을 편지로 보내어 9일 밤 모처로 왕림하실 것을 전했으며, 의친왕은 이러한 제안을 수락했다.

한편 정운복으로부터 의친왕이 허락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은 전협은 곧 이재호(李在浩)를 비롯해 정남용(鄭南用), 한기동(韓基東), 양정(楊楨), 동창진(董昌津), 나창헌(羅昌憲), 김중옥(金中玉) 등과 협의하고 의친왕을 만나면 함께 상해로 가기로 결의했다.

전협은 11월 9일 참판의 신분답게 경주 옥석으로 만든 안경을 쓰고 통영 갓에 비단옷을 입고 약속된 장소에서 기다렸으며, 이민하라는 갑부로 위장한 윤용주도 함께 동석했다.

또한 집주인 노파를 하녀로 꾸미고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김선(金善)은 그의 딸로 위장하여 의친왕을 접대하도록 계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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