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목장 신응수 선생이 환하게 웃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신응수 보유자
생계위해 공사 시작… 숭례문 중수 이후 대목수 자부심 느껴

[천지일보=김지윤 기자] 대목장 신응수(70) 선생은 박정희 대통령을 치켜세웠다. 문화재 복원을 열심히 추진했던 박 대통령의 모습이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라고 했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먹고 살기에 급급했습니다. 보릿고개였죠. 어느 누가 문화재에 관심을 두겠습니까. 그러한 상황에서 숭례문 등 문화재 복원이 곳곳에서 이뤄졌죠. 이 덕분에 제가 쉬지 않고 일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인생의 전환점은 1961년 5.16군사정변이 일어난 다음 해였다. 1962년 숭례문 중수가 시작됐다. 갓 스물이었던 신 선생은 당시 부편수였던 이광규 선생 밑에 들어가 설계부터 시공까지 직접 배웠다. 이전까지 생계형 목수 일을 해왔던 그에게 숭례문 복원은 대목장의 길로 들어서게 된 직접적인 계기였다.

한국 궁궐 목수의 적통인 이광규 선생을 직계 스승으로 모신 것은 그에게 큰 행운이었다. 그는 꼼꼼하고 완벽주의자인 이 선생에게 망치질부터 대패질까지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숭례문 중수 현장에서 스승의 스승인 조원재 선생을 만났다. 조 선생은 1906년 덕수궁 중건과 창덕궁 내전 복원에 참여했던 최원식의 제자였다.

신 선생은 군 제대 후 스승과 함께 진주성 촉성문, 서울 숭인동 청룡사 대웅전, 용인 호암장 신축 공사 등에 참여했다.

그는 인터뷰를 할 때마다 스승의 계보를 꼭 잊지 않고 말한다. 자신이 여기까지 걸어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외길을 걸어온 스승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숭례문은 그야말로 추억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곳을 지날 때마다 선생님들이 제게 말씀하셨던 게 떠오릅니다. 숭례문이 소실됐을 때 가장 먼저 달려갔습니다. 밤새도록 (숭례문 곁에) 서 있었습니다. 숭례문 중수 당시 선생님들과 함께했던 추억이 사라진다는 사실에 슬펐죠.”

▲ 신응수 선생의 사무실에는 숭례문의 모형이 있다.ⓒ천지일보(뉴스천지)

◆생계 위해 대목수의 길 걷다

그의 고향은 충북 청원군 오창면이다. 충남 병천중학교에 입학해 졸업할 때까지 약 8㎞를 걸어다녔다. 9남매 중 여덟째인 그는 집안 형편 때문에 상급 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17세에 상경했다. 목수였던 사촌형을 따라 집 짓는 곳이라면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목수 일이 꾸준히 있는 게 아니었다. 신 선생은 일이 없을 때 고향에 내려가 모를 심었다. 일이 있다는 전보를 받으면 공사하러 상경했다. 이러한 생활에 지쳐 다른 일을 찾아볼까하는 마음도 들었단다. 그때 숭례문을 중수하게 된 것이다.

◆행운의 사나이

신 선생은 조선 정궁인 경복궁을 비롯해 경주 안압지 등을 복원했고 현재 숭례문을 원래의 모습대로 돌려놓을 계획이다. 수많은 문화재가 그의 손에서 재탄생되고 있다.

“목수로서 궁궐을 짓는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대단한 영광입니다. 제가 대목수의 일을 하면서 문화재 복원 바람이 불었죠. 시대를 잘 만나 큰일을 하게 됐습니다. 궁궐을 뜯고 다시 짓는 경험이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죠. 운이 좋았습니다.”

당초 6월부터 숭례문 대목수 작업이 들어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주춧돌과 문루가 낡아 구조진단에 들어갔다. 선생은 금년 안에 대목수 작업을 진행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전했다.

이 시대의 대목장은 지난해 가슴앓이를 했다. 갓 지은 광화문 현판이 3개월가량 됐을 때 균열됐기 때문이다. 당시 덜 건조시켰다는 말이 많았지만 그는 틀림없이 3년 이상 자연 건조한 목재라고 강조했다.

“현판 제작에 사용한 소나무는 벌채한 다음에 통나무 상태로 3년 정도 창고에서 자연 건조시킨 것입니다. 그 중에 지름 60㎝ 이상 된 나무 4그루를 켜서 나온 판재 11점을 각자장에게 넘겼죠. 균열 소식을 들었을 때 심경이 복잡했습니다.”

신 선생은 무엇이든지 소홀히 일을 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대목장의 외길 철학을 담담히 읊조렸다.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제 대(代)에서 끝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목조 건물이) 수백에서 수천 년까지 가기 때문에 앞을 내다보고 지어야 합니다. 내가 짓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후손들이 두고두고 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는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광화문 현판 이야기가 나왔을 무렵 그는 와인 한 병을 꺼냈다. 광화문 이야기만 나오면 아쉬워 막걸리 등 한잔을 기울인단다. 그만큼 광화문에 대한 애정이 가득했다.

신 선생은 강원도 강릉에 우림목재를 차렸다. 그가 20여 년 전 세운 목재소는 양질의 나무를 키우기 위해 만들어졌다. 16년여 전에는 강원도 강릉과 정선군 일대의 임야를 샀다. 급하다고 어린 나무를 베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그는 “아직 나무를 키우고 있는 중”이라며 “두세 세대가 지나면 나무를 베도 괜찮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무나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면접을 통해 정말 대목수를 할 사람인지 확인하고 확인한 뒤에 선별한다. 마치 스승이 그에게 했듯이 말이다. 올해 일흔인 신 선생은 여유로우면서 열정적이다. 대목장으로서 갈 길이 멀다고 말하는 그. 숭례문이 선생의 손에서 올곧이 다시 태어나는 날이 기다려진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