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마리의 북청사자가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사진제공: 북청사자놀음보존회 이수자 오수용 선생)

중요무형문화재 제15호 북청사자놀음 이근화선 선생
북청사자놀음 50년 외길 “한 번도 후회 없어”
빠릿빠릿한 몸놀림… 일반 사자놀음과 다르다

[천지일보=김지윤 기자] 정월대보름을 코앞에 둔 열 나흗날 밤, 함경남도 북청군을 중심으로 북과 퉁소 소리가 어울린다. 오방색으로 한껏 무장한 사자가 장단에 맞춰 굼실굼실 나오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 뒤를 좇는다. 동네 어귀부터 이곳저곳 사자가 돌아다니며 그해 액운을 내쫓는다. 이튿날 새벽까지 지속된 사자놀음은 16일 이후에는 동네 유지들의 집을 번갈아 돈다.

북청사자놀음은 일반 사자놀이와 다르다. 일반 사자놀이는 탈춤의 한 부분이지만, 북청사자놀음의 주인공은 사자다. 이 놀이는 단순한 세시풍속이 아니다. 복을 빌고 액운을 쫓는 의식이며, 풍성한 올해를 소망하는 주민들의 기운이 사자놀이에 담겼다.

4~5세처럼 보이는 여아가 사자놀이를 하는 손위 오빠를 따라 나와 무동으로 섰다. 소리도 무동도 흥겨워 어깨를 들썩인다.

“남쪽에서는 무동이지만 북한에서는 산대라고 하죠. 네 살부터 오빠 어깨 위에 올라 산대춤을 췄습니다. 산대춤은 가벼워야 하니까 보통 7세 이후로 어깨 위에 올리지 않아요. 하지만 전 몸집이 왜소하다 보니 12세까지 산대춤을 췄습니다. 북청사자놀이와 첫 인연이 됐죠.”

12세 이후 아이는 산대춤을 더 이상 추지 못했지만 거사춤, 사당춤, 승무, 애원성 등 다양한 춤을 소화해냈다. 당시 무용을 특별히 배우지도 않았는데 몸놀림이 유연했단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된 이근화선 선생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북청사자놀음을 완벽하게 펼친다. 미수(米壽)를 앞두고 있지만, 여전히 피부색이 희고 단아하다.

꽃다운 나이 19세, 이 선생은 서울이 고향인 남편을 따라 서울로 건너왔다. 일제 치하에서 광복되기 1년 전이었다. 결혼한 그는 집안일 하랴, 타향살이 적응하랴 삶을 살아가는 데 바빴다. 사자놀이는 삶에서 점차 멀어져 갔다.

스물다섯이 되던 해 6.25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상황이 그랬듯 이 선생의 삶도 기구했다. 세 살배기 딸과 돌이 갓 지난 아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향했다. 남편과는 영영 헤어졌다. 그는 우리네 어머니들이 그러했듯 어린 남매를 양육하기 위해 억척스레 살았다. 이때만 하더라도 그에게 북청사자놀음은 저 건너편의 추억으로만 남았다.

3년간의 피난생활을 마친 뒤 다시 서울로 올라온 이 선생은 남편이 전쟁 전까지 꾸려왔던 동대문시장 점포에 자리 잡고 장사를 시작했다. 시장이 철거되자 평화시장으로 옮겼다. 동대문에서도 평화시장에서도 수완이 좋아 장사가 잘됐다. 이즈음 어디서 수소문했는지 이북5도청(현 이북5도위원회)에서 이 선생을 찾아왔다.

“이북5도청에서 저더러 북청사자놀이를 가르치라고 왔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저로서는 장사가 워낙 잘되니까 사자놀이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죠. 이북5도청 관계자는 제게 사정사정을 하더군요. 하는 수 없이 을지로2가에 위치한 어느 지하 창고에서 교육하게 됐습니다. 초창기만 하더라도 남자만 10명이었죠. 다들 이북에서 내려온 터라 북청사자를 배울 만한 사람이 서울에는 없었던 거죠.”

이근화선 선생은 일가친척들을 죄다 불러 북청사자놀음을 가르쳤다. 여자도 대여섯 명 모여들었다. 이 선생은 십여 년 간 하지 못했던 북청사자놀음을 다시 하려니 잊어버렸을까봐 조바심이 들었지만 막상 춤을 추기 시작하니 동작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래서 한 동작씩 원형 그대로 전수할 수 있었다. 가르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매년 열리는 민속놀이 전국대회에 참가했다.

1958년부터 사자놀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 선생은 의상도 자신의 것과 단원들 것 모두 손수 지어 입었다. 그동안 장사는 뒷전이었다. 돈 버는 일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니 손해를 입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래도 꽃이 활짝 피는 4월이면 발표공연, 낙엽이 지는 10월엔 전국대회에 꼬박 참가했다.

“단원 모두 사자놀음에 미쳤지요. 저도 자비를 들여 의상을 전부 제작할 정도로 사자놀음에 푹 빠졌습니다. 전국대회에 나갈 때마다 수상하니 이북5도청에도 좋아하고, 북청 출신 노인네, 피난민 등 너나 할 것 없이 흥이 돋았습니다.”

쏜살같이 흐르는 시간은 이 선생에게 야속하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과 함께한 이북 출신 어르신들이 점점 한 분 한 분씩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기 때문이다. 북청사자놀음을 전수할 사람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어 국가적으로도 큰 자산을 잃는 것과 같았다. 현재도 사자놀음 원형을 그대로 살리는 이는 이근화선 선생뿐이란다.

“나이가 여든이 넘었지만 북청사자놀음을 올바르게 전수하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아직도 연습실에 나오고 있습니다. 전 제 평생을 북청사자놀음 원형 전수에만 몰두 했습니다. 다른 것은 바라지도 않아요.”

▲ 북청사자놀음만을 고집하고 있는 이근화선 선생. 미수를 눈앞에 두고 있어도 북청사자놀음에 대한 열정은 청춘이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북청사자놀음에 대한 이 선생의 열정은 아직까지 식지 않았다. 거주지는 원래 서울이었으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원암리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자가용을 소유한 아들에게 차마 서울까지 데려달라고 말을 하지 못했다. 사업하는 아들에게 방해가 될까 노구를 이끌고 매일같이 서울에 있는 연습실까지 버스를 왕복으로 6번을 갈아탔다.

“북청사자놀음은 오늘날까지 피눈물이 나도록 열심히 노력해서 오늘날 이만큼 발전하고 이어온 것입니다.”

삼성동에 위치한 문화재전수회관에 북청사자놀음 연습실이 있다. 사자놀이의 대중화를 위해 토요일 오후에 무료 강습이 열렸단다. 하지만 전수관이 주 5일 근무제로 바뀌면서 강습은 어쩔 수 없이 연습시간을 목요일 저녁으로 옮겼다.

“연습시간대가 바뀐 것이 가장 아쉽습니다. 토요일 오후엔 학교를 마친 학생부터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스스럼없이 찾아왔거든요. 그런데 평일 저녁시간으로 한 뒤부터 공부하는 학생들은 올 수 없게 됐고, 그나마 있던 회원들도 각자 일 때문에 잘 오지 못하는 형편이 됐습니다.”

그는 북청사자놀음의 전도사다. 30여 년 동안 중·고등학교, 대학교를 오가며 춤을 보여주고 가르쳤다. 그만큼 사자놀음에 자부심을 느꼈다.

북청사자놀음은 다른 사자놀음과 달리 기운 있고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 한다. 남한 춤과는 다르다. 다른 사자놀음은 탈춤 가운데 한 부분이지만 북청사자놀음은 ‘북청’이라는 단어가 붙기 때문에 사자춤이 단연 돋보인단다. 특히 한국보다 사자무가 많은 일본에서도 한국의 북청사자놀음만큼은 꼭 부른다. 북청사자는 다른 사자와 달리 영민하고 흥겨운 가락에 맞춰 동작을 크게 취해야 한다.

“소고춤을 쳐도 ‘탁’ ‘탁’ 기운 있게 춰야 합니다. 넋두리와 사당춤 역시 정신이 바짝 나게 움직여야지 너절너절하게 추면 실감나지 않습니다.”

북청사자는 액운을 쫓는 오방색이 있고 털이 복슬복슬하다. 일본의 경우에는 사자에 털이 없다. 무대 위의 사자는 애교를 부린다. 고개를 좌우로 돌리기도 하고 꼬리도 흔드는 등 애교를 부린다. 북청군 수십 개의 마을에서 사자놀이가 동시에 이뤄졌으니 마을마다 사자탈 모습이나 제작이 달랐다. 우리나라에 사자는 없지만 사자춤은 신라 이후 꾸준히 전해져 왔다.

중국이나 일본에는 ‘사자무’라는 전통연희가 많다. 하지만 한국은 흔하지 않기 때문에 북청사자놀음과 관련해 학계에서 많은 관심을 보였다. 비록 장사는 부도를 맞았지만 1970년 북청사자놀음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오르자 그는 북청사자처럼 다시 툭툭 일어설 수 있었다.

지난 2009년은 이근화선 선생이 북청사자놀음을 한 지 50주년 되던 해였다. 반평생 이상을 북청사자놀음과 함께했기에 한 번쯤은 포기하고 싶을 때도 지겨울 법한 감정도 있었을 텐데 그는 고개를 저으며 단 한 번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단다. 그와 북청사자놀음은 운명이었던 셈이다.

“북청사자놀음은 어릴 적부터 해왔기 때문에 제 삶에 깊숙이 들어왔습니다. 정신적 지주죠. 앞으로 더욱 발전시킬 마음도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사자놀음에 손을 놓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 북청사자놀음…
[천지일보=김지윤 기자] 북청사자놀음은 함경남도 북청군 일대에서 해마다 음력 정월대보름을 전후 며칠 간 펼쳐지는 사자놀이다. 보름날 하루 전 날 밤 북청사자놀음을 하면 잡귀가 도망가고 동네에 평화가 온다는 이유로 길게 진행됐다. 꽹과리·징·장구·퉁소 등 다양한 전통악기로 흥겹게 연주하는 이가 있는가하면 사자탈을 쓰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이들도 있다.

북청사자놀음은 애원성·마당놀이·사자춤 등으로 구성된다. 먼저 쾌자(快子)를 입은 여인이 경복궁춤과 애원성춤, 성주풀이춤을 추고 양반과 하인이 등장하는 마당놀이로 넘어간다. 이때 하인은 양반의 명령에 따라 사당춤·무동춤·곱사춤이 펼쳐진다.

이후 사자가 나타나 다양한 재주와 춤을 보이다 힘에 부쳐 쓰러진다. 대사가 등장해 사자를 위해 반야심경을 외지만 살아나지 않는다. 의원이 나와 침을 놓자마자 사자는 당장 일어나 춤을 춘다. 이때 사당춤과 상좌의 승무 등이 어우러지는데 사자가 퇴장하면 동네 주민들은 ‘신고산타령’을 부르며 춤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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