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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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종이컵이 수십개 열과 행을 지어 도열된다. 그리고 커피, 프림, 설탕이 일정한 비율로 척척 스푼에 따라 담긴다. 눈들은 모두 큰 시계를 향한다. 째깍째깍! 아홉시. 업무 개시 시간. 뜨거운 물이 담긴 커피 포트는 이미 대기된 종이컵으로 향한다. 이제 종이컵은 커피찻잔이 되고 그 잔들은 사무실에 있는 각 사무원들의 책상으로 이동된다. 책상에 앉아 있던 샐러리맨들은 일종의 배달된 커피를 마시고 업무를 시작한다. 이 커피를 준비하는 이들은 샐러리맨들과 달리 자주색 유니폼을 입고 있다. 그 유니폼은 양장스타일이기 때문에 단번에 그들 모두 여성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런 장면이 담긴 개봉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비록 1990년대 초반의 풍경이지만, 차별로 설움 받는 상고 출신 여성들의 대기업 분투기를 그려 화제를 모았다. 이 영화는 단지 그들의 현실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당시 크게 논란을 일으켰던 페놀 유출 사고를 다뤄 사회적 메시지까지 담고 있었다. 당시 청춘들의 이야기를 사회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으니 요즘 젊은 세대에게서 발견되는 미닝 아웃 트렌드와도 맞물려 보인다.

그때까지만 해도 커피는 프림과 설탕을 나눠서 비율을 맞춰야 했고 그것을 전담하는 직군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커피 심부름을 한다는 것은 그런 젠더 프레임에 있었다. 이 프레임의 극단적인 위치에 있던 이들이 다방 레지이기도 했다. 물론 그 뒤에 편리하게 이를 한 번에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커피가 나온다. 바로 봉지커피다. 막대형으로 생긴 비닐 봉지안에 커피가루와 프림, 설탕이 같이 배합돼 있기에 따로 스푼으로 떠 넣을 필요가 없었다. 이환천 시인은 “내목 따고 속 꺼내서/ 끓는 물에 넣으라고/ 김 부장이 시키드나”라고 ‘커피믹스’라는 시에서 읊기도 했지만, 정작 봉지커피가 목을 딴 것은 여성들이었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 주인공들은 기업 사냥꾼들의 음모를 막은 결과로 유니폼을 벗고 커리어 우먼으로 거듭나는 성공 스토리를 보여준다. 이런 설정을 인정한다고 할 때, 적어도 1997년 IMF외환위기가 터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사실 기업 사냥꾼이 문제가 됐던 것은 2000년대 이후다. 90년대 초반에는 적대적 인수 M&A 같은 단어들은 익숙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CEO라는 단어에 속는 이들도 많았겠는가 싶다.

무엇보다 IMF외환관리체제가 되면서 바로 시행된 것은 인력 감축이었다. 그 인력 감축의 핵심 타깃은 약자들이었다. 수재였지만 가정 형편 때문에 상업고를 가야 했던 많은 여성들이 그 대상이 됐다. 스마트한 인재들이었지만 상고 졸업 딱지 때문에 커피를 타야 했던 여성들이 대거 해고됐고 그 커피타기는 봉지 커피가 담당하게 됐다. 물론 커피 타는 일을 그 여성들이 담당해야 할 일은 양성평등 원칙에 벗어난다. 여하간 많은 여성들은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주인공들처럼 승승장구하지 않았고, 거리에 내앉아야 했다. 그룹 내부의 거대한 비리와 음모를 폭로해야 정규사무직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또다른 좌절감에 빠지게 한다.

어쨌든 경제위기 상황 속에서 가장 먼저 인력 감축이 이뤄지고 그 대상은 약자들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엄청난 경제적 타격을 주고 있고 많은 인력 감축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 대상들은 약자들이다. 이러한 점은 데이터로도 나타나고 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 따르면 9월 여성 취업자가 28만 3000명(2.4%) 줄었는데 남성(0.7%)의 3.4배였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1~8월에 걸쳐 목숨을 스스로 끊은 사람은 남성이 11% 줄었는데, 여성은 오히려 2% 늘었다. 이유는 실직이나 비취업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현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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