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웨이팡(濰坊)시는 산동 동부의 요충지이다. 교주(膠州)와 제남(濟南)을 잇는 철도와 제남과 청도를 잇는 고속도로가 동서로 관통하고 있어서 물자가 집산하는 곳으로 뛰어난 인재가 많이 배출됐다. 제의 정치가 안영(晏嬰), 동한의 경학자 정현(鄭玄), 북위(北魏)의 농업전문가 가사협(賈思勰), 북송의 화가 장택단(張擇端), 여류시인 이청조(李淸照), 청의 서예가 유용(劉墉) 등이 있으며, 북송의 재상 구준(寇準), 문학가 구양수(歐陽修), 소식(蘇軾), 정치가 범중엄(范仲淹), 청의 화가 정판교(鄭板橋) 등도 이곳에서 관직을 역임하고 많은 묵적을 남겼다. 양가부(楊家埠)의 목판달력과 안구(安丘) 석가장(石家庄)의 농가풍속 및 전원생활은 웨이팡 특유의 볼거리이다. 민간예술 부문의 삼절(三絶)로 알려진 고밀(高密)의 전지(剪紙), 흙인형, 박회(撲灰) 달력도 유명하다. 웨이팡은 유명한 수공업 도시로 옛날을 느낄 수 있는 입체예술의 화랑이다. 이곳 농가에서 생활하는 여행프로그램도 있다. 마차를 타고 연을 날리며 꽃가마에 앉아서 느긋함을 즐긴다면 왜 바쁘게 살아야 하는지 의문이 간다. 매년 개최되는 국제 연날리기대회는 국내외에서 명성이 높다.

유성구(濰城區) 십홀원(十笏園)은 도광(道光)11년(1885)에 조성된 이 지역 최고 부자 정선보(丁善寶)의 주거용 원림이다. 정선보가 이 집을 사들였을 때는 주건물 연향루(硯香樓)만 남아 있었다. 정선보는 연못을 파고 그 흙으로 산을 쌓았다. 연향루의 수석은 이 고장에서 으뜸이다. 공산당 집권 이후 시정부가 자리를 잡았다가 나중에 박물관으로 바꾸고 일반인에게 공개했다. 십홀은 10개의 홀을 깔아 놓은 것처럼 작다는 뜻이다. 그러나 크고 작은 20여 개의 건축물들이 적당한 밀도를 유지하고 있어서, 북국의 호방하고 대칭적인 건축특색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남국의 섬세하고 다변한 특색도 겸비하고 있다. 정청인 십홀초당은 사랑방으로 1925년에 강유위(康有爲)가 머문 적이 있으며, 지금도 국내외 귀빈들이 사용하고 있다. 북쪽의 연못 속의 사조정(四照亭)의 편액은 청말 장원 조홍훈(曹鴻勳)의 글씨이다. 연못 북문에는 당대 문학가 한유(韓愈)의 글씨를 모사한 연비어약(鳶飛魚躍)이라는 글자가 있다. 연못 동북쪽에는 ‘온여주(穩如舟)’라는 배 모양의 기이한 건축물이 막 물살을 헤치고 항해를 떠나는 모습이다.

십홀원 정경이 보이는 웅장한 주건물 연향루는 유일하게 남은 명대 건물로 아래쪽은 넓고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진다. 1979년부터 청대의 유명한 서화가이자 시인 정판교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정판교는 건륭11년(1746)에서 1753년까지 유현현령을 역임했다. 재임기간 동안 정치적 업적은 물론 수많은 명작을 남겼다. 십홀원 서쪽 정원인 원중원(園中園)에는 손님을 접대하던 정여산방(靜如山房)과 추성관(秋聲館)이 있다, 1979년에 이곳을 문물전시관으로 고쳤다. 후원에는 크고 작은 석각들이 흩어져있다. 동쪽 처마 아래에는 원의 담처단(譚處端)이 쓴 구사비(龜蛇碑)가 있고, 서쪽 처마 아래에는 명의 동기창(董其昌), 장서도(張瑞圖), 문징명(文征明)이 쓴 비각이 있다. 가산 아래에는 의람정(漪嵐亭)에서 연못에 일렁이는 물결을 바라보면 아지랑이가 이는 것 같다. 산꼭대기에 있는 우수정(蔚秀亭)에는 양주팔괴(楊州八怪) 가운데 한 사람인 김농(金農)이 아름다운 백묘법(白描法)으로 그린 나한상(羅漢像)을 새긴 돌이 있다. 양주팔괴는 일반적으로는 왕사신(王士愼), 황신(黃愼), 김농, 고상(高翔), 이선(李蟬), 정섭(鄭燮), 이방응(李方膺), 나빙(羅聘) 등 8명을 가리킨다. 이방응 대신에 민정(閔貞), 고상 대신에 고봉한(高鳳翰)을 꼽기도 하므로 반드시 고정된 것은 아니다. 주로 꽃이나 인물화를 그렸던 이들은 전통적인 화법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분방하고 독창적인 작품 활동을 했으므로 ‘괴(怪)’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들의 화풍은 우리나라의 장승업(張承業)에게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 크지 않은 정원에서 대청제국 최전성기의 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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