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남제의 무제 소색(蕭賾)이 죽은 후, 울림왕(鬱林王) 소소업(蕭昭業)이 뒤를 이었다. 서창후(西昌侯) 소란(蕭鸞)이 상서령이 돼 대소사를 장악했고, 경릉왕(竟陵王) 소자량(蕭子良)이 가끔 참여하기도 했다. 소자량은 세상사에 초연했으나, 소란은 남의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소박함을 가장하고 나름대로 깨끗하게 공무를 처리해 조야에서 인망이 두터웠다. 그러나 야심만만한 그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찬탈할 계획을 세웠다. 순식간에 조정은 그의 심복들로 가득했다. 울림왕은 향락에 빠졌다가, 곳곳에서 소란의 견제를 받게 되자 비로소 불편함을 느끼고 소란을 제거하려고 했다. 파양왕(鄱陽王) 소장(蕭鏘)이 말했다.

“소란은 종실의 최연장자이자 선제의 고명대신입니다. 신과 같은 젊은이가 중임을 맡기에는 과분합니다. 조정에 의지할만한 사람이 있으니 폐하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란은 울림왕의 방종을 기회로 더욱 박차를 가했다. 울림왕의 심복 소심(蕭諶)과 소탄(蕭坦)까지 찬위를 권유하면서 울림왕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했다. 울림왕은 대항하지 못했다. 소자량이 죽자, 소란은 더욱 방자해졌다. 갖가지 소문이 난무했다. 견디다 못한 울림왕은 중서령 하윤(何胤)과 소란을 제거할 계책을 꾸몄다. 겁이 많은 하윤은 대책은커녕 소란에 대해 좋은 말을 늘어놓으며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위로했다. 울림왕은 소란을 서주(西州)자사로 좌천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소란의 당원들이 병권과 정무를 장악했고, 여러 왕들마저 소란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으므로 외부와 소통할 수 없었다. 울림왕은 소탄을 불렀다.

“소란이 나를 몰아내고 스스로 자립하려고 한다는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태평성세에 천자를 폐출한다니 어불성설입니다. 조정에서 이런 요망한 말을 하겠습니까? 비구니들이 지어낸 말을 믿지 마십시오. 증거도 없이 그들을 죽인다면 인심이 흔들립니다.”

울림왕은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보고를 받은 소란은 더욱 행동을 서둘렀다. AD 494년 7월, 소란은 선수를 써서 소심을 궁으로 파견해 울림왕의 심복 조도강(曹道剛)과 주륭지(朱隆之) 등을 살해했다. 서승량(徐僧亮)은 대노해 군사들에게 지금이야말로 천자의 은혜에 보답할 때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소리만 컸지 대항할 능력이 없었던 그도 피살되고 말았다. 소란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운룡문(雲龍門)을 통해 궁으로 들어갔다. 어지간한 그도 궁으로 들어갈 때는 상당히 긴장했던 것 같다. 세 번이나 신발을 고쳐 신었다. 놀란 울림왕은 대전의 문을 모두 닫으라고 지시했다. 소심이 들어오자, 울림왕은 칼을 뽑아 자결하려고 했다. 실패하자 비단으로 목을 맸다. 소심이 재빨리 끌어내려서 가마에 태워 연덕전(延德殿)을 나섰다. 소란이 대전으로 들어갔을 때 숙위무사들이 무장하고 저항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소심이 내가 잡으려는 사람은 너희와 무관하니 움직이지 말라고 소리쳤다. 무사들은 그의 말을 믿었다. 나중에 울림왕이 끌려나오자, 무사들은 울림왕의 명령을 기다렸다. 놀란 울림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실망한 무사들은 천자가 소심의 칼을 맞고 죽는 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울림왕의 죽음은 대신들의 보좌를 받지 못한 것이 원인이지만, 더 중요한 원인은 불리한 상황에서 과감한 결단을 내리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소란의 음모를 미리 알고 있었다. 몇 차례나 소란을 제거하려고 했지만 남의 말에 현혹돼 시간을 끌다가 결국 자신이 기른 호랑이에게 물려죽고 말았다. 소란은 울림왕의 수족과 이목을 철저히 가렸고, 깨끗한 정치인이라는 평판을 받으며 지지 세력을 확보했다. 환락에 빠져 정무를 돌보지 않았던 울림왕과는 전혀 대조적이었다. 누구라도 울림왕보다는 소란에게 기대를 거는 것이 당연했다. 결국 울림왕은 속수무책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소란의 주도면밀한 준비와 과감한 결단이 돋보이지만, 그의 승리는 상대가 너무 약했기 때문이라는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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