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caption

6월이 오면 온 산하가 핏빛으로 물들었던 그 때 그 날을 기린다. 오늘 우리는 이처럼 아름다운 신록의 계절을 아무런 부담 없이 맞이하고 즐기고 있지만, 오늘의 이 아름다운 강산이 있기까지의 그 과정엔 별 관심들이 없다. 피로 싸웠고 이겼고 지켜왔으니 피로 만든 강산인데 말이다. 

그런데 어찌 눈에 보이는 전쟁만 있고 피 흘림이 있겠는가. 눈에 보이는 전쟁보다 더 참혹한 전쟁과 피가 있다는 점도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눈에 보이는 전쟁을 말하고자 한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말이 있다. 옛것을 익히고 이를 통해 새것을 알아간다는 뜻이다. 오늘날 새로워지기만을 강조하고 새것만을 찾고 좋아하는 현실에서 온고지신이라는 말 자체가 오히려 새로움으로 와 닿으니 아이러니다.

‘오늘’은 어제라는 지난 역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날이며, 내일이라는 가야 할 길과 일이 있기에 현재가 있는 것이니 곧 징검다리와 같은 교량적 역할을 할 뿐임을 깨닫게 된다. 이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존재하는 이유며,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깨달아야 하는 이유다.

모든 것이 퇴색되고 낡아지고 버려지는 가운데 우리의 가치관마저 뒤엉키고 혼재되고 순리가 역리로 바뀌면서 근본 된 본질마저 왜곡되는 상황에 이르고야 말았다. 이러한 때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정의와 진실과 본질을 되찾고 회복해야 하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사명이 아닐까. ‘저건 왜이래’ 하며 강 건너 불 보듯 남의 일처럼 여길 일이 아니라 나와 우리가 관심 갖고 해결해야 할 우리의 일이 아닐까.

예고 없이 찾아온 코로나19는 모든 것을 앗아가기도 하고 또 새롭게 하기도 한다. 이럴 때 무조건 옛 것을 버리고 잊고 오직 새로운 것만 추구한다는 그릇된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새롭게 한다는 것은 새것만을 추구하라는 의미보다는 잘못된 생각과 의식을 고쳐 바르게 하고 회복하는 일이 아닐까.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들 한다.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도전과 응전”을 역설했다. 오늘이라는 현재가 거저 온 것도 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며, 수많은 세월 선조들의 고뇌와 역경이 일궈낸 산물이라는 데 방점이 맞춰져야만 오늘을 사는 우리는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이 ‘역사(歷史)’라는 말처럼, 인류가 걸어온 과정과 굴레 속에서 문명이 발달했고, 시대마다 새로운 사조(思潮)를 만들어왔고, 급기야 오늘 우리가 맞이한 새로워져야 할 시대며 사명 앞에서 이 시대가 마땅히 가져야 할 가치관 즉, 새롭고 의미 있고 합당한 사조를 또다시 잉태하게 된 것이 아닌가.

이러한 역사의 과정은 숭고한 것이며, 하루아침에 터부시 되고 새것만을 강조하고 또 추구하기만을 꾀해선 안 된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찾아온 6.25, 이 6.25의 참상은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온 지구촌이 절대 잊어선 안 될 비극임을 명심해야 한다. 한반도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시대를 이끈 사조가 만들어낸 비극이니 세계가 함께 되돌아보고 느끼고 반성하고 답을 찾는 귀한 시간들이 돼야 할 것이다.

나아가 “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 날을...”이라는 가사처럼, 당사자 된 우리는 더욱 그날의 참극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를 복기하고 답을 찾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꼭 그래야 하는 이유는 왜 피 흘려 죽어야 하는지 그 이유도 모른 채 이름 모를 산야에서 산화한 영령들의 넋을 위로하고 기리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원인 없는 결과가 없듯이, 조선의 건국과 훈구세력의 권력화와 사림의 등장은 피 비린내 나는 사대사화를 야기 시켰고, 이어지는 사림의 분열과 붕당은 늘 혼란으로 이어졌고, 이는 외세를 불러들이는 원인이 됐으며, 외세침탈이라는 치욕의 역사를 경험해야 했고, 그 끝은 동족상잔이라는 참혹한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야 말았으니 어찌 이 날을 잊을 수가 있으며, 잊어서야 되겠는가. 시대마다 변화무쌍하게 새로워지는 사조를 읽지 못하고 현실에 매여 아옹다옹 하던 지난 역사를 이 시대는 분명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오늘 이 시대 또한 개념도 없는 이념에 함몰돼 파벌은 또 다른 파벌을 낳으며 또 다시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부끄러운 역사는 되풀이 돼야만 하는 건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꽃다운 청춘, 이유 없이 죽어야 했던 청년의 피와 피 묻은 군복은 오늘도 사랑하는 조국 이 강산의 원혼이 되어 말없이 지켜보고 있음을 잊지 말자.

목적 없는 평화와 이념 논리와 논쟁은 평화와 전쟁의 본질을 희석시키며 그 날의 피 묻은 군복을 입어야 했던 청년의 가슴에 다시 한 번 못질을 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온고지신’의 진정한 의미를 깊이 되새겨 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래본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