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편집부 정리]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1980년 5월 17일 24시.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정치활동 중지 ▲대학 휴교령 ▲내외 집회 시위 금지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의 사전 검열 등의 ‘포고령 10호’를 발령했다.

5월 18일 10시. 계엄군은 전남대학교 학생들의 등교를 막았고, 이에 학생들이 항의하자 계엄군은 잔혹한 폭력을 휘두르며 시민들까지 폭행하기 시작했다.

이를 시작으로 광주 지역 대학생들은 “비상계엄 해제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농성을 펼쳤다. 그러나 계엄군은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를 무차별 폭력으로 제압했다.

시민들은 계엄군의 잔인함에 점차 분노했고, 적극적인 저항을 시작. 19일 새벽 도심곳곳에서 시민과 계엄군이 충돌하자 계엄군은 장갑차와 헬기를 동원해 광주역 앞에서 발포를 시작했다.

5.18 최초 희생자로 기록된 故김경철씨. 청각장애인이었던 그는 5월 18일 친구들과 헤어지고 집으로 가던 중 영문도 모른 채 계엄군에 붙들려 구타당해 19일 목숨을 잃었다.

5살 아이는 친구들과 놀다 총소리가 나서 집으로 달려가던 중 신발 한 짝이 벗겨져 뒤를 돌아보다 계엄군이 쏜 총탄에 희생됐다.

시민들은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했고 가족과 이웃, 그리고 자유를 지키기 위해 무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시민군’이라고 불렸다.

시민군과 계엄군의 대치 중 계엄군은 전략적으로 퇴각하고, 시민군은 전남도청을 장악. 시민군이 도청을 사수한 5월 21일부터 26일까지 7일 동안 광주시민들은 주먹밥과 빵 등을 서로 나누고, 부상자들을 위해 헌혈하는 등 함께하는 공동체를 형성했다.

5월 27일 새벽. 도심 곳곳에서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날 새벽 4시경. 계엄군은 도청으로 향했다. 교전 시간은 1시간 남짓. 도청에 남아있던 윤상원(시민군 대변인)을 비롯한 많은 시민군은 싸늘한 시신이 되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가자, 도청으로”라는 짧은 구호. 최후의 항전을 벌이다 수많은 시민군은 결국 이곳 도청에서 산화됐다.

민주화를 염원하며, 불법 집권 신군부 세력에 저항했던 광주시민들의 숭고한 희생과 정신이 일궈낸 1980년 5.18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횃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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