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호로고루성 홍보관 내부
호로고루성 홍보관 내부

‘호로강’ 역사, 지정학적 고찰

호로고루성은 예부터 주민들에게 ‘재미산(財尾山)’ 혹은 ‘재미성(財尾城)’이라고도 불렸다. ‘미’는 성이라는 뜻이다. ‘미’나 ‘퇴미’ ‘재성’ 등으로 불리는 곳에는 대게 주변 산 위에 성이 있다. 호로강은 개성과 서울(백제 위례성)을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이런 이점이 고구려가 이 성을 중시한 이유다. 호로강을 설명한 글 가운데는 ‘조수간만의 영향을 받는 감조(感潮) 구간의 상류에 위치하여 임진강 하류 에서부터 배를 타지 않고 도하(渡河)할 수 있는 최초의 여울목’이라는 표현이 있다.

고구려 수도 평양지역에서 출발한 고구려군이 백제 수도인 한성(漢城)을 공격하기 위한 최단 거리는 평양에서 개성을 거쳐 장단을 지나 호로고루성 앞의 여울목을 건너 의정부 방면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이 비밀을 안 장수왕은 아무 방비 없이 무장해제 된 태평성대 개로왕의 위례성을 쉽게 공격 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안정복의 <동사강목>에는 ‘문무왕 2(662)년 김유신은 소정방과 함께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 한다. 그러나 군량이 부족할 뿐 아니라 군사가 피로하여 퇴각한다. 김유신 등은 돌아올 적에 밤새 행군하여 이곳 호로하를 지나게 되었다. 이때 고구려군이 신라군을 추격하여 공격을 했으나 호로하(瓠瀘河)에서 만나 크게 격파하였다’고 되어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7 문무왕조>와 <동문선 권 57 서(書) ‘답당설총관인귀서(答唐薛摠 管仁貴書)’>에 보면 김유신 장군이 고구려군과 호로하에서 교전하는 내용이 나오고 있다. 663년 정월 설인귀와 김유신은 평양성으로 군량을 수송하다 여의치 않자 각자 대군을 이끌고 퇴각한다. 그리고 그 퇴각 결과를 설인귀에게 다음과 같이 알린다.

“대군은 또 돌아가고자 하였고, 신라의 병마(兵馬)도 식량이 다 떨어져 돌아오는데, 군사는 주림과 추위에 손발이 얼어 터져서 길가에서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호로 하(瓠瀘河)에 이르자 고구려의 병마가 뒤쫓아와서 언덕 위에 진을 벌이거늘, 신라 군사는 피곤한 지 오래였고 적이 멀리 쫓아올까 두려워하여, 적이 강물을 건너기 전에 먼저 건너 접전하니 선봉이 잠시 교전하자, 적군이 와해(瓦解)되었으므로 마침내 군사를 거두어 돌아왔습니다.”

호로고루성 옆 호로강
호로고루성 옆 호로강

<삼국사기 하 열전 김유신 조 제2>의 기록에도 ‘호로하’가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밤중에 몰래 그곳을 빠져나와 표하(호로강)에 이르러 급히 강을 건너 군사를 쉬게 하는데 고구려 군사들이 그 다음날 이를 알고 추격하여 오므로 유신은 만노를 함께 쏘게 하니 고구려 군사들이 물러서므로 유신은 모든 부대의 장병들을 나누어 거느리고 내달아 적을 쳐서 이를 대파하고 적장 1명을 사로잡고 1만 여명을 참살하였다.”

668년 고구려군은 호로고루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한 것으로도 기록된다. 이 시기에 고구려는 신라로부터 이 성을 탈환한 것인가. <미수기언 동사(東事) ‘신라세가 하’>에 보면 “고구려가 망하고 당나라 장수 이근행(李謹行)이 고구려의 남은 무리를 호로하(瓠瀘河)에서 격파시키니 여러 패잔병들이 모두 신라에 항복해 왔다.”라고 나온다. 이 기록은 호로고루 등 제성에서 고구려 군사들이 주둔하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근행은 본래 말갈 장수로서 당나라에 귀화하여 신라 침공의 선두에 선 무장이다. 당나라가 이근행을 시켜 20만 연합대군으로 신라를 공격해 온 시기는 675년이다. 그러니까 호로하에서 고구려군이 이근행에게 패한지 7년 후의 일인 셈이다.

그런데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 벌어졌다. 연천 매초성에서 신라군은 9군(약 5만 명 추산)을 출진시켜 20만 대군을 저지하려했다. 20만 대 5만의 결전은 상대가 되지 못하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매초성에서 신라군은 당나라군을 대파한다. 20만에 달하는 기병이 1000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세기의 대전으로 전쟁사에 남을 우리 민족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 아닌가.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이 전쟁에서 신라에 항복한 고구려군의 참전이었다. 그리고 이미 신라에 합세한 백제군도 이 전쟁이 참전했다. 매초성 전투는 민족이 연합하여 외적과 싸운 첫 사례가 된다. 고구려, 백제군은 이 전쟁에서 자신들이 입고 있던 군복과 깃발을 들고 출전했다. 호로고루 성을 연구하면서 이 성을 지키던 고구려 군사들이 신라에 투항하여 함께 당나라 외세를 물리친 자랑스러운 역사가 된다.

호로고루성 홍보관
호로고루성 홍보관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