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백제사] 공산성의 배신, 백제 멸망 재촉 (2)
[다시 쓰는 백제사] 공산성의 배신, 백제 멸망 재촉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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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공산성 내부 모습
공산성 내부 모습

피신한 공산성 성주의 배신

공산성으로 피신하여 마지막 항전 의지를 불태우던 의자왕도 뜻밖에 배신을 당했다. 배신의 주역은 공산성을 지키던 토호세력였다. 성주 예식진(禰寔進). 바로 이 사람이었으며 그는 백제 멸망 후 당나라에 귀화, 귀족으로 대접 받고 호화롭게 살다 죽었다.

황산벌에서는 장군 계백의 5000결사대가 백제 사직을 구하려고 장렬히 전사한 반면, 예식진은 불가항력을 들어 의자왕에게 배신의 비수를 꽂은 것이다. 두 개의 상반된 역사는 백제 멸망사의 대조적 사례다. 그러나 <삼국사기> 의자왕조에는 이 사실이 누락되었다.

예식진의 의자왕에 대한 배신은 중국 사료에 나온다. <구당서(舊唐書)> 소정방 열전에 보면 ‘660년 7월, 나당연합군 공세에 밀린 의자왕은 사비도성을 떠나 웅진성으로 달아났다가 같은 달 7월 18일에 사비도성으로 와서 연합군에 항복했다. 대장(大將)인 예식(예식진)이 또한 의자를 데리고 와서 항복하니 태자 융(隆)과 여러 성주(城主) 전원을 함께 보냈다.’고 나오는 것이다.

사실 의자왕이 자신의 의지로 항복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민족사학자 단재 신채호 선생에 의해 제기된바 있다. 예식이라는 인물이 의자왕을 잡아 항복한 것이라는 주장은 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지난 2006년 중국 뤄양(洛陽) 고완(古玩) 상가에서 매우 재미난 유물이 찾아졌다. 바로 예식진의 묘비(墓碑)였던 것이다. 바로 구당서 기록에 나오는 ‘예식’의 묘비로 확인된 것이다. 아! 중국에서 공산성 배신자 예식진의 면모를 파악할 수 있다니 흥미롭고 매우 중요한 발견이었다.

역사학자 김영관 박사(백제 부흥운동사 전공)는 이 비문을 연구했다. 신라사학회 기관지 <신라사학보> 10호에 투고한 ‘백제유민 예식진 묘지 소개’란 논문에서 묘지명을 통해 새롭게 부각된 예식진은 <구당서> 소정방(蘇定方) 열전에 보이는 백제 대장군 예식과 동일인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묘지명에는 예식진의 선대와 생애가 소상히 기록되어 있었다. ‘백제 웅천(熊川) 사람으로 당에서는 좌위위대장군(左威衛大將軍)을 역임했으며, 할아버지는 좌평(佐平)까지 오른 예다(藝多)이고, 아버지는 좌평을 역임한 사선(思善)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예식진이 당 고종(高宗) 함형(含亨) 3(672)년 5월 25일에 내주(來州) 황현(黃縣)이란 곳에서 58세를 일기로 사망하고, 황제의 명에 의해 같은 해 11월 21일 당시 당의 수도인 시안(西安)으로 운구돼 고 양원(高陽原)이란 공동묘지에 묻혔다고 돼있다. 이로 보아 예식진은 백제 무왕(武王) 15년인 615년에 웅진성에서 출생, 660년 백제 멸망 당시에는 46세였다.

묘지명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大唐故左威衞大將軍來遠縣開國子柱國禰

(대당고좌위위대장군래원현개국자주국녜)

公墓誌銘幷序(공묘지명병서)

公諱寔進百濟熊川人也

(공휘식진백제웅천인야)

祖佐平譽多父佐平思善竝蕃官正一品雄穀

(조좌평예다부좌평사선병번관정일품웅곡)

爲姿忠厚成性馳聲滄海效節靑丘公器宇深

(위자충후성성치성창해효절청구공기우심)

沉幹略宏遠虛弦落雁挻劍飛猨夙禀貞規早

(침간략굉원허현락안연검비원숙품정규조)

標義節占風異域就日長安式奉文棍爰陪武

(표의절점풍이역취일장안식봉문곤원배무)

帳腰鞬玤鶡紆紫懷黃駈十影於香街翊九旗

(장요건방갈우자회황구십영어향가익구기)

於綺禁豈與夫日磾之輩由餘之儔議其誠績

(어기금기여부일제지배유여지주의기성적)

較其優劣者矣方承休寵荷日用於百年遽促

(교기우렬자의방승휴총하일용어백년거촉)

浮生奄塵飄於一瞬以咸亨三年五月卄五日

(부생엄진표어일순이함형삼년오월입오일)

因行薨於來州黃縣春秋五十有八

(인행훙어래주황현춘추오십유팔)

恩加 詔葬禮洽䬾終以其年十日月卄

(은가 조장례흡제종이기년십일월입)

一日葬於高陽原爰命典司爲其銘曰

(일일장어고양원원명전사위기명왈)

溟海之東遠截 皇風飧和飮化抱義志承

(명해지동원절 황풍손화음화포의지승)

榮簪紎接采鵷鴻星搖寶劍月滿雕弓

(영잠치접채원홍성요보검월만조궁)

恩光屢洽寵服方隆逝川遽遠非曲俄窮烟含

(은광루흡총복방륭서천거원비곡아궁연함)

古樹霜落寒叢唯天地兮長久與蘭菊兮無終

(고수상락한총유천지혜장구여란국혜무종)

비문에는 예식진을 높이 평가했다. 그의 공은 김일제(金日磾)보다 더 위대하다고 추켜세운것이다. 김일제는 흉노족으로 중국에 귀화하여 공을 세운 전설적인 인물. 전한(前漢) 중기의 인물로 자는 옹숙(翁叔)이다. 열네 살 때 부왕이 무제와의 전투에서 패하면서 전한에 포로로 끌려왔다. 이후 무제의 신임을 받아 전한의 관료로 일하면서 김씨(金氏) 성을 받았으며, 말년에 투후(秺侯)에 봉해졌다. 예식진을 김일제에 비교한 것은 그가 당 황조에 큰 공을 세웠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예식진은 의자왕과 1만~2만여 명이 넘는 백제 포로들을 당으로 끌고 가는 데도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전후 자신의 임지인 공산성에서 살지 못하고 당나라로 갔다. 예식진은 왜 당나라로 들어가 귀화한 것일까.

사비성이 점령당한 얼마 후 다시 결집된 백제복국군의 활동에 위험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660년 가을 복신(福信)이 이끄는 백제 복국군의 공격 목표가 왕도 사비성과 공산성의 탈환으로 이어진다. 만약 이때까지 예식진이 공산성에 남아 있었다면 배신자로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예식진 비문
예식진 비문

공산성 최후의 날 시나리오

의자왕이 항복한 날짜는 중국 측 기록을 보면 7월 18일이었다. 그러니 사비성에서 탈출하여 공산성으로 간 의자왕은 4~5일 안에 무너진 셈이다. 의자왕이 공산성으로 잠입하는 순간 사태는 급박하게 전개되었다. 의자왕은 제장들과 함께 공산성을 사수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주 예식진은 항전은 불가하다고 얘기했을 게다.

당시 의자왕이 입었던 갑옷은 어떤 것이었을까. 바로 저수조에서 찾은 ‘정관(貞觀)’명 옻칠 갑옷이 아니었을까. 고대 당나라 황제에게 귀중한 것을 진상하면 비슷한 것을 답례품으로 하사하는 것이 상례였다.

공산성주 예식진은 결국 왕을 사로잡아 소정방에게 바치기로 한다. 이 과정에서 왕의 시위 군사와 예식진 군사들 간의 충돌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상정된다. 예식진의 군사들이 왕을 사로잡아 무장해제 했을 것이다.

벗겨진 갑옷은 공산성 우물에 버려졌다. 그리고 예식진은 의자왕과 태자 효 그리고 시위 군사들을 사로잡아 소정방 앞으로 나갔을 것이다. 예식진은 사전에 당과 내통하고 의자왕을 사로잡아 항복할 경우 자신의 안위에 대한 보상을 약속받았지 않았을까. 그가 나중에 당나라에서 높은 직급으로 승진하고 후손들까지 대대로 영화를 누리고 산 것을 보면 이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

공산성 우물지
공산성 우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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