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백제사] 공산성의 배신, 백제 멸망 재촉 (1)
[다시 쓰는 백제사] 공산성의 배신, 백제 멸망 재촉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18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1400년 전 웅진 참담한 역사의 비밀

성주 예식진·검은 금갑 주인공은 누구

공산성에서 바라본 풍경
공산성에서 바라본 풍경

2011년 10월. 공주 공산성을 발굴 중이던 학술조사단은 집수유적에서 진귀한 유물을 건졌다. 많은 양의 옻칠 가죽 갑옷 편과 함께 수많은 명문(銘文)을 확인한 것이다. 조사단은 탄성을 질렀지만 ‘이 갑옷이 왜 공산성 우물에서 찾아진 것일까’라는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다.

명문은 ‘행정관십(行貞觀十)’ ‘구년사월이십이일(九年四月二十二日)’이었다. ‘정관(貞觀)’은 바로 당나라 태종의 연호(627~649)가 아닌가. 정관 19년은 645년(乙巳年), 즉 의자왕 5년에 해당된다. 이와 함께 뚜렷한 여러 글자들이 잇달아 확인됐다.

‘왕무감(王武監)’ ‘대구전(大口典)’ 등을 비롯해 ‘삼군사(參軍事)’ ‘○작배융부(○作陪戎副)’ ‘○인이행좌(○人二行左)’ ‘근조(近趙)’ 등 20여 자가 판독되었다. 이런 글자는 무엇을 의미하며 당태종 연호가 쓰인 갑옷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인가.

갑옷이 만들어진 의자왕 5년은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가. 사실 의자왕은 백제를 지키기 위해 당나라에 호의적이었다. 즉위 다음해(642년)부터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시작했으며 5년 동안 한해도 거르지 않고 충성스러움을 표명했다.

의자왕 4(644)년에는 정월에 당에 사신을 보내자 당 태종은 사농승상 이현장을 파견하여 신라·백제의 분쟁을 중재하기도 했다. 갑옷에 등장하는 정관 5(645)년 5월에 왕은 친히 당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한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징발하여 신라의 7개성을 빼앗기도 했다.

백제는 과거 당나라 황제에게 금갑(金甲)을 제작하여 바친 조공사례가 많았다. 삼국사기에는 무왕 27(626)년, 38(637)년, 40(639)년 그리고 의자왕 5(645)년에 다양한 종류의 갑옷을 당나라에 보낸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 본기> 제9 보장왕조 4년 5월조에 “(전략)時 百濟上金髤鎧 仗以玄金 爲 文鎧 土被以從 帝與勣會甲光炫日 云云(시 백제상금휴개 장이현금 위 문개 토피이종 제여적회갑광현일 운운)”이라 기록됐다. “이 같은 갑옷을 제작하여 조공한 것은 백제가 당나라의 고구려 정벌을 지원한다”는 의미에서였다. 백제본기에 보이지 않은 것이 고구려본기에 나오는 것이 재미있다.

이렇게 갑옷을 제작하여 정성스럽게 보냈지만 당은 신라 편에 서서 백제를 침공하여 멸망시킨 것이다. 황제의 연호가 쓰여진 갑옷을 입은 주인공은 누구이며 왜 그것이 우물에 버려진 것인가. 백제 멸망의 날 급박했던 역사의 비밀은 또 어떤 것이었을까.

정관명 갑옷
정관명 갑옷

백제 멸망의 날 의자왕의 피신

660년 7월(음력). 나당연합군이 합세하여 백제왕성 사비를 공격하자 성내에는 수만 여 명이 필사 항전을 했다. 그러나 당군 13만, 신라군 5만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상자만 1만 명에 이르자 의자왕은 태자 효(孝)와 함께 궁성을 빠져나와 공산성으로 피신했다.

그렇다면 사비 왕도 안에는 몇 명이 살고 있었던 것일까. 나중에 당장 소정방이 데려간 포로 숫자가 1만 2000명(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조에는 신료 93인과 군사 2만 명으로 되어 있음)인 것을 감안하면 최소 3만여 명 이상이 거주했을 것으로 상정된다.

사비도성 주변에 많은 성을 두고 의자왕은 왜 공산성으로 피신한 것일까. 그것은 공주가 전대의 왕도로서 많은 군사력이 있으며 후일을 도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궁성에 남은 의자왕의 차자 태(泰)는 자신이 왕이 되어 잔병을 데리고 성을 사수하려했다. 그리고 사신을 보내 당의 철병을 간청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백제 왕자가 좌평 각가(覺加)를 시켜 당나라 장군에게 철병해 줄 것을 애걸하였다.’ ‘백제의 왕자가 또 상좌평(上佐平)을 시켜 가축과 풍부한 선물을 보냈으나 소정방이 물리쳤다.’ ‘백제왕의 서자인 궁(躬)이 좌평 여섯 사람과 함께 소정방을 찾아보고 용서를 빌었으나 또 거부하였다.’ 등 3차례나 굴욕적인 협상을 시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때 왕궁 안의 태자 아들 문사(文思)는 왕자 융(隆)에게 ‘왕이 태자와 함께 나간 틈에 숙부가 마음대로 왕이 되었으니 만약 당병이 포위를 풀고 돌아가면 우리들이 어찌 안전할 수 있으리요.’ 하면서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했다. 혼자 남은 태(泰)도 결국은 성을 지키지 못하고 나당연합군에 항복했다.

이 기록에서 주목되는 것은 나당연합군의 침공 시 의자왕은 공주로 피신하고 성에는 왕자와 백성들의 마지막 처절한 항전이 있었으며 이 가운데 배신자가 나와 성문을 열어주고 패망을 자초했다는 점이다. 절체절명의 순간 배신행위는 사비성뿐 아니라 공산성에서도 발생했다.

공산성 전경
공산성 전경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권희 2019-12-25 20:17:11
전술에 패한 걸까요? 아님 당나라의 신임을 얻지 못한 것일까요? 1400년 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지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