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칼럼] 역사 속에 잊혀진 종친부 변천사 재조명(1)
[박관우 칼럼] 역사 속에 잊혀진 종친부 변천사 재조명(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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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본 칼럼에 소개하는 종친부(宗親府)는 조선시대 역대 모든 제왕의 어보(御寶)와 어진(御眞)을 봉안(奉安)하고 종실제군(宗室諸君)에 관한 각종 사무, 즉 봉작(封爵), 승습(承襲), 관혼상제(冠婚喪祭) 등의 업무를 의논하고 처리하던 관청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제군부(諸君府)라는 명칭으로 불리워졌는데, 종친부는 1430년(세종 12) 관제로서 확립됐으며, 세조(世祖) 대에 종친 중용이라는 예외적인 상황도 있었으나, 종친에게는 직무를 맡기지 않는다는 원칙은 조선왕조 대에 계속 유지됐다.

이러한 원칙으로 인하여 조선시대에 종친부는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고종(高宗) 대에 이르러서 다시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특히 고종의 생부(生父)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국왕의 아버지를 떠나서 종친들의 일원(一員)이었기 때문에 종친부가 설치된 이후 의미 있는 변화가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발생했다.

그런데 이러한 종친부 이외에 언급할 또 다른 관청이 있으니 종부시(宗簿寺)라는 것인데 여기서 그 구체적인 업무를 살펴본다.

종부시의 업무는 크게는 두 가지라 할 수 있는데 하나는 왕실의 보첩(譜牒)을 편찬하는 일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종친의 비리를 감찰하는 일이었는데, 특히 종친들의 비리에 관한 조사를 사헌부(司憲府)가 처리하지 않고 종부시가 담당하였다는 것은 다분히 이중적인 의미를 내포한다고 할 수 있었다.

종친부 경근당(제공:박관우 역사작가) ⓒ천지일보 2019.12.16
종친부 경근당(제공:박관우 역사작가) ⓒ천지일보 2019.12.16

다시 말해 종부시가 종친들의 비리를 감찰하는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종친들에 대한 예우를 고려하는 측면이 있는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는 종친부가 아닌 종부시가 감찰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종친들에 대한 견제 기능을 담당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종친의 반열에 있는 인원이 거의 없어졌다는 것인데, 이러한 상황에서 종친들의 위상은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종친부의 운영상황을 보여 주는 종친부등록(宗親府謄錄)에 의하면 영조(英祖) 대 까지만 하더라도 봉군(封君)된 종친들이 많았는데 정조(正祖) 대 이후 봉군된 종친들의 인원이 대폭 줄어들면서 그 위상이 저하(低下)됐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1847년(헌종 13) 2월 11일부터 기술된 종친부 등록의 내용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데 바로 이 무렵에 흥선군(興宣君)이 종친부 유사당상(有司堂上)에 임명되면서 그동안 위축됐던 종친부가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던 것이다.

1856년(철종 7) 11월 19일 종친부는 그동안 종부시가 주관했던 선원보(璿源譜)의 수정을 맡으려고 시도했는데, 구체적으로 식년(式年)마다 선원세계(璿源世系)의 수정을 위해 선파인(璿波人)들이 종부시에 내는 단자(單子)를 종친부가 관장하고 종부시는 단순히 보첩의 출간만을 담당하자는 것을 고종에게 건의했다.

한편 이 일을 국왕에게 허락받은 종친부는 각 지방에 연락해 앞으로는 선파인의 단자를 종친부로 올릴 것을 지시했는데, 신역을 면제받기 위하여 종친부의 확인이 끝난 단자만이 유효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러한 종친부의 움직임에 대하여 종부사 제조(提調) 조병준(趙秉駿)은 종친부가 선파인의 탈역(頉役)을 주관하다는 것이 법적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반발했다.

이러한 종부사의 반발로 수보단자(修譜單子)를 종친부가 주관하기로 한 것은 원점으로 돌아가게 됐으며, 그 일을 주도했던 흥선군은 파직이 되기에 이르렀으나, 결국 흥선군의 시도는 성공을 거두게 됐으니, 1860년(철종 11) 11월 30일 각파세보(各派世譜)를 종친부가 수정하라는 전교가 내려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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