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황산성에서 찾아진 백제시대 연화문 와당
황산성에서 찾아진 백제시대 연화문 와당

세계 전사에 남는 황산벌 전투

신라군이 황산벌에 진출한 날자는 음력 7월 9일이다. 설화에는 계백이 “처자가 적국의 노비가 되어 살아서 욕보기보다는 죽는 것이 낫다.”라고 하며 처자를 죽이고 비장한 각오로 출병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계백은 험준한 곳을 가려 3개의 영채를 세우고 신라군을 기다렸다. 이 기사를 보면 평지에 진을 구축하지 않고 비교적 높은 곳에 진을 구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황산벌 인근에 진(陣)을 삼은 지형은 지금의 어디일까. 김유신도 신라군을 3도(道)로 나누어 이에 대항하였다고 돼 있다. 결사항전을 다짐한 백제 5000군사들은 신라군과 네 번 싸워 네 번 모두 승리하였다. 먼 길을 행군해 온 신라군은 기력이 다하고 사기가 떨어졌다. <삼국사기> 기록을 빌리면 신라 장군 흠춘이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아들 반굴(盤屈)로 하여금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케 했다. 장군 품일도 16세의 어린 아들 관창(官昌)을 백제군 속에 뛰어 들어가 싸워 죽도록 하였다. 소년들은 모두 왕족 출신의 소년 전사들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백제군의 규모에 대해서 5000~1만 5000명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1만 5000명설은 계백(달솔)보다 상위 직급인 좌평 충상, 상영이 참전했음을 이유로 든다. 즉 이들이 더 많은 병력을 인솔하여 배치하였다고 상정하는 주장이다. 계백은 전투가 시작되기 전 군사들 앞에서 사자후를 토한다.

“지난날 구천(句踐)은 5000명으로 오(吳)나라 70만의 무리를 격파하였다. 지금 오늘 마땅히 각자 힘써 싸워 승리함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자.”

7월 9일부터 10일까지 이틀간 백제군은 진지를 지켰으나 마지막 5번째 공세에는 버티지 못했다. 진영이 무너지고 좌평 충상, 상영을 비롯한 20여명은 사로잡혔으나 계백을 위시한 결사대 5000은 장렬하게 전사했다.

백제군이 네 번이나 신라군과 조우하여 승리한 것을 감안하면 당시 백제군의 결사 용맹이 주목되는 것이다. 당군과의 합류 일정이 늦어지자 소정방은 신라의 장수 김문영을 처형하려고 했으나 김유신이 강경대응하면서 무마되었다.

백제시대 것으로 보이는 와편과 토기들
백제시대 것으로 보이는 와편과 토기들

탄현과 황산벌을 가다

7월 폭우 속에 글마루 취재팀은 신라 5만 대군이 진군했던 탄현을 넘었다. 취재팀은 지금은 차량이 통행할 수 있는 금산-추부-복수면-진산을 거쳐 벌곡에서 잠시 쉬고 탄현을 찾았다. 역사를 아는 듯 모르는 듯 말이 없다. 이곳이 백제 운명을 가른 탄현인가.

왜 의자왕은 성충, 흥수 두 충신의 간언을 듣지 않고 나라를 멸망의 길로 빠뜨렸는가. 백제는 의자왕 시대 신라의 50개성을 공취하는 등 연전연승의 길을 가고 있었다. 싸울 때마다 신라군이 패퇴했다. 그 오만이 신라를 얕잡아 보고 당나라와의 교류를 외면하면서 정보에 어두웠다.

성충의 간언은 임진전쟁 발발 십여 년 전 선조에게 10만양병설을 주장한 율곡 이이의 주장을 떠올리게 된다. 전쟁은 평화 시에 미리 대비해야만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탄현과 백제 멸망의 역사를 반추하는 의의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글마루 취재팀(답사팀)은 연산면 관동리 김태원 이장의 안내로 황산성(黃山城)을 답사했다. 해발 264m 산 정상에 축조한 이 성은 둘레 800여m로 왕도 부여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고 있는 요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계백장군의 5000결사대가 험난한 곳에 진을 친 3영 중 하나일 수 있다.

황산성에서 내려온 지맥과 명암리 야산을 방어망으로 진을 구성한 것이라면 지금의 관동리는 그 중심이다. 향적산, 천호산에서 발원한 연산천은 자연적으로 황산성의 해자가 된다. 이 곳을 막으면 신라 대군의 진군을 억지할 수 있었다.

테메식의 이 산성은 석축성으로 전형적인 백제식이다. 그런데 이 성은 산 능선이 연산천 가까이 이어져 자연적으로 포곡을 이루고 있다. 성안 관동리의 넓은 면적을 포용하고 있는 것이다. 관동리는 신라화랑 관창의 전사지로 전해져 내려오는 곳이다.

성안에서는 백제시대에 축조했을 우물지가 그대로 남아 있다. 정연하게 다듬은 돌을 이용 원형으로 조성한 우물에는 맑은 물이 철철 넘치고 있다. 성안 곳곳에는 고식의 백제 와편과 토기들이 산란하고 있다. 백제시대 것으로 보이는 토기 파수부(把手付. 쇠뿔 손잡이)도 찾아졌다. 회백색의 연질 파수부는 전형적인 백제 토기편이다.

글마루 취재팀은 서문지에서 백제시대 연화문 와당을 찾는 개가를 올렸다. 무늬가 없는 높은 주연부와 간판(間瓣)이 살아있는 연화문 와당은 쉽게 백제 와당임을 알 수 있다. 황산성 건물 옥개면에 와당을 사용했다는 것은 이 성의 중요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시급히 발굴, 규명을 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황산성은 연산면주민자치위원(회장 도기정)가 둘레길을 조성, 관광지로 이름을 내고 있다.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성금을 거둬 산성으로 오르는 길에 가마니를 깔기도 했다. 이 운동에 김만중(논산시 행정자치위원장) 시의원, 이정휘 연산면장이 적극적으로 힘을 보태고 있다. 백제 호국의 얼이 어린 성지가 국가차원의 빛을 보지 못하자 주민들이 가꿔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간절한 소망은 황산성의 사적지정이다. 그리고 백제 5000결사대의 얼을 추모할 기념물의 건립이다. 수 천 백제, 신라 젊은 전사들의 시신이 잠든 이곳을 지키는 것은 고려 초에 세워진 국찰(國刹) 개태사(開泰寺)다. 대웅전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독경이 영혼들을 위로하는 소리같아 가슴에 와 닿는다.

고려 초 세워진 국찰 개태사
고려 초 세워진 국찰 개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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