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백제사] 청주 부모산은 ‘모산성’인가 (2)
[다시 쓰는 백제사] 청주 부모산은 ‘모산성’인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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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청주 부모산성 성벽
청주 부모산성 성벽

백제 후기까지 처절한 전쟁양상

부모성(父母城)에 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청주목 고적조에 나온다. ‘고을 서쪽 15리에 있는데 돌로 쌓았고, 둘레는 2427자이고, 성안에 큰 못이 있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졌다(父母城 在州西十五里石築周二千四百二十七尺內有大池今廢).’라고 되어있다. 부모산성은 현재 충북도기념물 제121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을 안내한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산성은 산의 지형을 이용해 성벽을 쌓아 평면이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성벽의 둘레는 1135m이며, 성벽의 윗부분은 많이 무너졌으나 기저부는 온전히 남아 있다. 성벽의 너비는 6.4m이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성벽의 높이 또한 너비와 비슷할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동서남북에 통행로가 있으며, 산성이 있는 산줄기를 따라 몇 개의 작은 규모의 보루 성들이 있다.

부모산성은 2012년 발굴을 하면서 뜻밖의 신라 유구를 찾았다. 부모산성을 처음 구축한 장본인들이 백제인들이 아닌 신라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발굴결과 부모산성 본성은 6세기 이후 신라가 처음 축조하고 백제가 개축해 사용했을 가능성을 확인했다. 제1보루는 서북, 나성(羅城)과 극히 유사한 기술로 축조돼 있어 백제에 의해 축성된 것으로 판단했다.

출토유물도 백제 토기와 기와, 신라 토기 등이 혼재했다. 백제와 신라가 이 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치열하게 격전을 벌이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보고서를 보면 부모산성 서벽구간에서는 서문터와 함께 성벽 본체 및 보축 성벽의 구조와 축조방법, 성 내벽에 덧붙인 반원형의 석축시설물, 보축성벽에 덧붙여 시설한 외환도 등이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제1보루에서는 토축과 석축으로 이루어진 대단히 독특한 성벽 구조와 축조방법 등이 확인되었다.

서벽구간은 심하게 파괴된 상태지만 이번 조사를 통해 서문터의 정확한 구조를 처음 확인하는 성과를 올렸다고 했다. 그리고 문지 구조를 통해 신라가 처음 축조한 이후 백제에 의해 문지가 개축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성벽축조기술은 성벽 본체(체성벽)와 성벽 외부 하단에 삼각형모양으로 덧댄 보축성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신라성벽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성벽구조를 하고 있다.

따라서 초축 성벽은 신라가 6세기 이후 청주 지역에 진출하면서 축조되었다고 내다본 것이다. 또한 외환도(外環道)와 내벽에 덧댄 반원형의 석축시설이 신라성에서 처음으로 확인되고 있는데 이 외환도는 성벽 외부의 보축성벽 하단에 덧대어 만든 것으로 성벽의 진행 방향을 따라 너비 1.4~1.5m로 시설돼 있다. 외측은 가공된 장방형 석재를 이용하여 2~3단 정도 면을 맞춰 1열로 축조했으며 내부는 할석과 점토를 이용해 외측면 높이와 맞추어 수평면을 이루게 만들었다.

산성에서는 신라 백제시기 사용됐던 집수시설을 발굴했다. 집수시설은 원형으로 직경 9m에 3단의 계단석으로 축조됐다. 그리고 바닥 면은 얇은 판석형 돌을 깔았다. 그런데 내부에서 연화문 와당을 비롯한 다량의 기와류와 고배(高杯), 완(盌) 등 6세기 후반경의 유물이 출토됐다. 토기들은 신라의 유물로 해석되었다.

청주 부모산성에 산란한 와편
청주 부모산성에 산란한 와편

백제 ‘前部’세력의 부모산 진주

백제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오부제(五部制)를 두었다. 중앙의 부족은 중부(中部)가 되고, 나머지는 방위 명을 따서 동부(東部)·서부(西部)·남부(南部)·북부(北部)로 나눴다. 왕도 중부의 중심세력은 왕족인 부여씨(扶餘氏) 집단이었다.

문주왕이 천도한 웅진(熊津)시대 이후의 편제는 달랐다. 수도를 상부(上部)·전부(前部)·중부(中部)·하부(下部)·후부(後部)의 오부로 나누고, 각 부를 다시 오항(五巷)으로 나누어 사서(士庶)로 하여금 거주하게 하였다. 각부의 책임은 달솔(達率)이 맡게 했다.

<삼국사기> 직관조 기록을 보면 달솔은 16관 등의 하나로서 품은 2품이고 정원은 30인이었다고 되어 있다. 관은 은화(銀花)로 장식하고 옷은 자색(紫色)이었다는 것이다. 수도 5부 및 지방의 오방(五方)의 장인 방령(方領)에는 달솔의 관등을 가진 자가 임명되었으며 예하에 500명의 군사를 예속시켰다고 한다.

부모산성에서는 뜻밖에 ‘前’자 명 인각와(印刻瓦)와 ‘後’ ‘大’자 명문 기와를 포함한 백제계 기와류가 다량 출토되었다. 이는 부모산의 지배세력이 왕도에 있던 ‘전부(前部)’세력이었음을 알려준다. 그만큼 백제 왕도에서 중요시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백제 유적에서 이같이 ‘전부(前部)’명 인각와가 찾아진 곳은 전북 임실 성미산성, 익산 왕궁리, 부여 동남리 등이다. 중요한 지역에는 ‘전부’세력을 보내 방어했음을 알려준다. 전부세력이 중요한 귀족세력이었던 것은 <일본서기>에도 등장한다.

<일본서기>를 보면 ‘백제 사마왕(武寧王)은 부모산성 집수시설 515년 전부(前部)의 목협불마갑배목라(木脅不麻甲背木羅)를 섬진강 어구로 파견하여 왜국의 물부연을 기문(己汶)으로 데리고 와 위로했으며 백제의 군신들은 옷과 도끼 비단과 토산물들을 궁 안에 가득 쌓아놓고 그들을 초청하여 위로했다’는 기록이 있다. 무령왕이 전부의 관리를 특별한 지역에 파견한 예를 알려준다.

또 <일본서기> 권19 천국배개광정천황(天國排開廣庭天皇) 흠명천황(欽明天皇) 8년 여름 4월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8(547)년 여름 4월 백제가 전부(前部)의 덕솔(德率) 진모선문(眞慕宣文)과 내솔(奈率) 기마(奇麻) 등을 보내어 구원병을 청하였다. 그리고 하부(下部)의 동성자언(東城子言)을 보내어 덕솔(德率) 문휴마나(汶休麻那)를 교대하게 하였다.

전부세력이 진주했던 부모산성에서 나온 삼국시대 와당은 신라계 같기도 하고 백제양식 같기도 하다. 주연(周緣)은 소문대이며 연판은 팔판(八瓣)으로 백제 일반 양식을 따랐다. 자방은 돌기되었으며 연자는 음각으로 표현되었다. 간판은 정연하여 고식을 따르고 있는데 태토는 고운편이며 색깔은 옅은 갈색이다. 그러나 전성기 백제기와에서 나타나는 정제되고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할 수는 없다. 혹 백제군에 포로가 됐던 신라장인들이 만든 기와가 아니었을까. 전쟁의 와중에 급히 만든 조악품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연화문 막새로 산성 안의 건물을 치장했다면 전부의 우두머리인 달솔이나 귀족이 거주하던 집일 수 있다.

처절한 전쟁의 역사

<삼국사기>에 모산성을 둘러싼 ‘나-제’간의 전쟁기록은 여러 차례 나타난다. 신라 벌휴이사금 5(188)년 시기 ‘봄 2월 백제가 와서 모산성을 공격하여 파진찬 구도에게 명사를 내어 이를 막았다(春二月 百濟 來攻母山城 命 波珍飡仇道 出兵拒之云云).’는 것이다.

<백제본기> 초고왕 23(188)년 봄 2월조에 이 같은 기사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있다. ‘궁전을 수리하고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의 모산성을 공격하였다(重修 宮室 出師攻新羅母山城).’는 기사다. 또 사비시기인 무왕 17(616)년에는 ‘달솔 백기(苩奇)에게 명하여 8000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모산성을 공격하였다(冬十月命達率苩奇領兵八千 攻新羅母山城).’

지금까지 학계는 모산성을 전북 남원 운봉에 있는 아막성(阿莫城)으로 비정하고 있다. <삼국사기> 권 제36 잡지 제5 지리3에 ‘남원소경 백제 고룡군 운봉현조 신라초 모산성’이라 했으며 ‘운봉현은 천령군에 속해 있으며 지금의 함양군이다. 운봉현은 본 모산성이며 혹 아영성 혹은 아막성이라고 한다(天嶺郡 本速含郡景德王改名 今咸陽郡 領縣二 雲峰縣 本母山縣 (或云 阿英城 或云 阿莫城云云).’는 기록을 감안한 것이다.

그런데 신라본기 소지왕대 기록에는 모산성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 하나 발견된다. 즉 ‘신라 소지왕 6년(484, 고구려 장수왕 72년) 7월 고구려가 신라 북방 국경을 침범하자 신라가 백제와 연합하여 모산성 아래서 격파하였다(六年 秋 七月 高句麗 北侵 我軍 與百濟合擊於母山城下大破之).’라는 대목이다.

이 기록을 보면 모산성의 위치는 고구려에 접한 신라의 북방 지역이며 백제의 원군을 이용하여 함께 작전을 벌일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충청도 지역에서 모산성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남원 운봉 아막성을 모산성으로 비정하는 이유로는 부합되지 않는다. 이 시기 고구려가 남원까지 내려왔을 가능성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모산성과 아막성을 다른 별개의 성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 진평왕 24(602)년 기록에 ‘가을 8월에 백제가 아막성(천령군의 속현)을 공격 신라가 격퇴하다. 화랑 귀산 추항이 전사했다(秋八月 百濟 來攻阿莫城王使將士逆戰大敗之貴山 箒項死之).’는 기록이 있으며 백제 무왕 3년 8월조에도 ‘신라의 아막성을 공격 실패하고 철병했다(王出兵圍新羅阿莫山城).’는 기록이 나오는 것이다. 백제본기 무령왕조에는 아막성이 막산성(莫山城)으로 기록된다.

운봉의 아막성을 아영성(阿英城)이라고 부른 것은 부모산의 ‘아양산’과 일치한다. ‘아양’ ‘아영’은 한문표기로 ‘부모’ 혹은 ‘모산’으로 썼기 때문이다. 이 같은 근거에서 운봉의 아막성이 모산성으로 이해되어 온 것이다(남원 운본 아막성과 기문국에 관해서는 차기 호에서 다룰 예정이다).

청주 백제유물전시관
청주 백제유물전시관

미호천 유적 조사의 필요성

백제 신라의 격전지 초기부터 멸망시기까지 전쟁이 그칠 새가 없던 모산성은 어디일까. 백제왕들이 그토록 빼앗으려고 노심초사한 염원했던 모산성은 혹 청주 부모산성은 아닐까. <삼국사기> 기록의 여럿 정황들이 맞아떨어지는 곳이 바로 부모산이다. 특히 신라가 먼저 축성하고 후에 백제가 보축했다는 발굴조사 결과로 미루어 본다면 더욱 신빙성이 와 닿는다. 신라와 백제의 일진일퇴의 공방전과 주인이 자주 바뀐 곳이 모산성이었기 때문이다. 마한 애양국으로부터 백제에 이르기까지 최대의 백제유적으로 평가되는 청주 서부지역에 대한 확대된 조사가 필요하다. 신봉동 철기 유적보다 더 중요한 유적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 특히 미호천 유역의 청주 첨단산업 단지의 확장에 따른 철저한 유적 조사도 필요하다.

미호천 유역과 오송, 세종시로 연결되는 일대의 구릉에 산재해 있는 선사유적 조사도 중요하다. 필자는 90년대 연세대 박물관장이었던 지금은 고인이 되신 손보기 박사와 함께 미호천 유역 오창 등지에서 주먹도끼, 사냥돌, 긁개 밀개 등 구석기 유물들을 수습한 적이 있다. 고인께서 너무 기뻐 활짝 웃으셨던 기억이 생생하다.

미호천 구석기 유물들은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과 비교된다. 구석기 문화권은 대전 갑천 선사유적과도 연계되며 광대한 선사유적의 보고를 이루고 있다. 미호천은 선사시대부터 마한, 백제, 신라(서원경), 고려에 이르기까지 문화가 발전해 온 중요 유적지이다. 한 지역에서 이처럼 수 만년을 지속해온 유적도 찾기 힘들다. 그 중심에 백제의 처절한 항전과 권토중래의 역사가 숨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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