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경제논단] 법무부는 6·29를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미디어·경제논단] 법무부는 6·29를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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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맹기 서강대 언론대학원 명예교수

 

SNS가 활성화 되면서 ‘적극적 자유’가 한참 진행된 가운데 언론자유가 다시 회자된다. 아이러니한 현상이 국내에 일어난다. 박근혜 정부 탄핵에 대한 반성은커녕 문재인 청와대는 가짜 뉴스, 오보를 잡겠다고 벼르고 있다. 방통위원장이 가짜뉴스 운운하더니, 이번에는 대통령이 먼저 나서고, 법무부가 뒤따랐다.

다시 정국이 언론자유로 헛소동이 벌어진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16일 법무부 차관을 불러 ‘아주 시급한 과제’라고 검찰 개혁을 주문했다. 조국 일가의 위법 혐의와 파렴치 행위 보도에 대한 불만이 반영된 것이다. 조선일보는 문 대통령이 “그동안 검찰이 무죄로 추정되는 피의자를 일부러 망신 주고 압박한 경우가 많았다. 언론도 국민 알권리와 피의자 인권의 균형에 대해 계속 고민해야 한다”라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인권은 계속 무시한 검찰이었다면, 그 당시 문제를 제기하는 야당은 없었고, 일방적으로 몰아갔다. 형평성, 공정성에 문제가 있는 대목이다. 지나고 난 일이지만 탄핵 정국의 jTBC, TV 조선, 한겨레 등은 일정부분 ‘기획된 오보’, 즉, 가짜뉴스 색깔이 짙게 깔려 있었다. 이번 조국 위법 행위는 처음부터 조선일보 등 언론이 정보를 갖고 시작했다. 언론은 조국 민정수석 시절부터 오랫동안 자료를 축적시키고 있었다.

이번 사건으로 법무부는 ‘보도원칙 훈령’, 즉 ‘형사사건 공개금지 등에 관한 규정’을 정하고 다음 달 1일부터 시행하기로 했다. 그 훈령에 따르면 “법무부가 새로 만든 규정안은 검찰이 수사 중인 형사사건에 대해 수사 상황이나 피의 사실 등을 원칙적으로 공개하지 못하게 했다. 또 전문공보관을 제외한 검사나 수사관도 기자와 개별적으로 만나지 못하게 했다”라고 했다.

만약 취재로 오보를 낼 경우 검찰청 출입을 제한한다고 했다. 비판이 거세지자 검찰청 출입을 막겠다는 강력함이 하루만에 ‘수사 지장 초래’ ‘추측성 보도’를 삭제하고, 인권을 침해한 오보를 포함시켰다. 그것도 공직자에게는 명예훼손 부분이 느슨한 잣대로 보호를 받을 수 있다. 국민의 알권리와 표현의 자유 등의 영역은 ‘실천적 인류학(practical anthropology)’으로 간주하는 것이 옳다. 대통령과 법무부가 일괄적으로 판단을 할 수 없는 영역이다. 국민에게 감시를 받아야 할 공직자가 감시를 받지 않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겠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필자는 평상시 출입처에 앉아 받아쓰기하는 기자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 기자는 선전, 선동, 세뇌의 도구를 작동시킨다. 물론 그 정확성을 따지면 출입처 가는 것 아닌 것은 기자가 결정한다. 출입처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보자.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1987년 6월 29일 “정부는 언론을 장악할 수도 없고, 장악하려고 시도하여도 안 된다. 언론을 심판할 수 있는 것은 독립된 사법부와 국민이다”라고 선언을 했다. 이 사건이 6공화국 탄생의 시발점이 됐다. 6공화국 언론 운동은 박종철(朴鍾哲)군 ‘고문치사 가능성’의 의문 제기에서부터 시작됐다.

중앙일보 사회부 신성호 기자는 “1987년 1월 15일 오전 9시 50분 이홍규 대검찰청 공안 4과장 사무실에 들렀다. 주요 사건을 담당한 검사실을 돌며 취재거리를 찾던 중이었다. ‘경찰 큰일 났어’(이 과장) ‘그러게 말입니다’(신 기자). 그 친구 대학생이라지. 서울대생이라며? 조사를 어떻게 했기에 사람이 죽은 거야. 더구나 남영동에서..(이과장).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수사단이 있는 남영동에서 서울대생이 경찰 조사를 받다가 숨진 사건이 일어났다. ‘쇼크사’ ‘고문 가능성’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이라는 사실도 확인했다.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 그날 오후 석간신문이던 중앙일보 사회면에는 이런 제목의 1단 기사가 실렸다(고대훈,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나요?, 중앙일보, 2017년 12월 30일).

한편 1987년 1월 16일 석간 동아일보는 “두피하 출혈과 목, 가슴, 하복부, 사타구니 등 수십 군데에 멍 자국이 있었다”는 박종철 군의 삼촌 박월길의 증언을 바탕으로 타살의 실마리를 찾아내기 시작하였다(오명, ‘민족과 더불어 80년: 동아일보 1920~2000’(서울: 동아일보사, 2000), pp. 481~482).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쇼크사로 박종철 군의 사인을 거짓 발표한 경찰에 비난의 질책이 쏟아지던 와중에 이한열(李韓烈) 군이 머리에 최루탄 파편이 박혀 사망한 사건이 벌어졌다. 독재시대의 6.29선언은 이렇게 발표된 것이다. 그 혜택을 지금까지 보고 있는 586세력이 출입처 운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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