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머무는 시] 창 - 노향림(194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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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향림(1942 ~  ) 

손바닥만한 밭을 일구던
김 스테파노가 운명했다.

그에게는
십자고상과 겉이 다 닳은 가죽 성경,
벗어놓은 전자시계에서 풀려나간
무진장한 시간이
전부였다.

한평생

그에게 시달렸던 쑥부쟁이 꽃들이
따사로운 햇볕 속
상장(喪章)들을 달고 흔들리는

조객(弔客)이 필요 없는 평화로운
곳.

[시평]

우리는 전설 같은 베트남의 호치민의 이야기를 들으며, 정말 그런가, 그럴 수 있는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곤 한다. 호치민이 죽고 난 뒤 남겨놓은 것은 오직 낡은 옷 한 벌과 그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 하나가 전부라니. 이런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과연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며 감탄을 한다. 최고의 권력자였던 호치민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김 스테파노는 천주교 신자였던 모양이다. 이름이 그러하다. 가진 재산이라고 평생을 일구던 손바닥만한 밭 한 떼기가 전부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남긴 것이라곤 다만 십자고상과 겉이 다 닳은 가죽 성경책 한 권. 그리고 벗어놓은 전자시계가 고작이란다. 그리고는 그 전자시계에서 풀려나간 무진장한 시간이 전부란다.

그렇다 그는 비록 남겨놓은 것이 없지만, 무진장한 시간을 우리에게 남겨놓았다. 호치민이 그러하듯이. 한 평생 그가 일구던 밭에서는 쑥부쟁이들이 꽃을 피워 따사로운 햇볕 속, 상장을 흔들어주는 장례. 그 어떤 조객도 필요가 없는 이 지상의 가장 평화로운 장례. 그는 어쩌면 그를 가두었던 시간을 벗어나, 무진장한 시간 속으로 성큼 발을 들여 놓았는지도 모른다.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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