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백제사] 마한 수장국 ‘목지국(目支國)’은 안성인가(2)
[다시 쓰는 백제사] 마한 수장국 ‘목지국(目支國)’은 안성인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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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안성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보물 제989호)
안성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보물 제989호)

백제 초도 위례성의 직산설 혼동

<삼국사기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천안 직산이 백제 초기 수도 위례성이라고 나온다. 이는 마한 ‘목지국-백성-백제’의 음운 이화를 이렇게 해석한 것으로 상정된다. 즉 목지국, 안성이 백제라고 불렸으며 초기 온조가 한강변에 의탁하여 국호를 백제로 계승했기 때문이다. 또 목지국의 고지로 추정하는 직산 지역이 옛날에는 안성현에 속한 곳이었기에 가탁된 것은 아닐까.

천안시 성거면 위례산에 구축된 석성은 일단 유사시 직산지역의 주민 보호를 위해 구축된 4~5세기 백제 전성기 석성으로 ‘목지-안성-백제’로 불려진 것이 이런 초기 수도설을 만들어 낸 것이라고 생각된다.

천안시 성거면 위례산은 몇 번에 걸친 학계의 발굴조사가 있어지만 온조 건국시기의 유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주로 삼국시대 후기에서 신라, 고려시기의 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그러나 평지와 연결된 직산 사산성(蛇山城, 충남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군동리)에서는 마한과 백제 초기에 사용됐던 토기의 파편들이 다수 수습되었다. 이 성은 마한 목지국과의 연관을 상정할 수 있는 매우 주목되는 유적으로 향후 확대된 조사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봉업사지 절터에 남아 있는 오층석탑
봉업사지 절터에 남아 있는 오층석탑

백제는 북부여계… 성왕대 정체성 천명

백제는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고구려에서 권력투쟁에서 실각된 온조와 소서노(召西奴)에 의해 세워진 나라다. 온조는 본래 북부여 우태(優台)의 아들이었으나 소서노가 주몽에게 개가하였으므로 어린 시절 고구려 왕실에 의지했었다.

소서노(召西奴)는 졸본부여의 5부족 가운데 하나인 계루부의 공주였다. 일설에는 유력자인 연타발의 딸이었다고 한다. 북부여 왕 해부루의 서손(庶孫)인 우태와 혼인했다가 우태가 일찍 죽자 비류와 온조라는 두 아들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동명왕의 아들 유리가 뒤늦게 나타나 왕위를 계승하므로 화를 염려한 나머지 남하한 것이다.

소서노는 두 아들을 데리고 한강유역까지 내려왔으나 마땅히 한 곳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큰 아들 비류는 지금의 인천인 미추홀에 가서 의탁하고 온조는 마한 땅의 일부를 빌어 살기로 했다. 온조를 따르는 무리는 10명의 신하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스스로 ‘십제’라는 국호를 사용했다. 온조가 정착한 곳은 한산(漢山, 지금의 아차산)이 바라보이는 한강변 몽촌토성이었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는 소서노와 온조 비류의 남하관계 기사가 다음과 기술되어 있다.

(전략) 유리가 태자에 오르자 비류와 온조가 의논했다. “고구려 건국의 공이 거의 우리 어머니에게 있는데, 이제 어머니는 왕후의 자리를 빼앗기고 우리 형제는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이 되었다. 대왕이 계신 때도 이러하니, 하물며 대왕께서 돌아가신 뒤에 유리가 왕위를 이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는가. 차라리 대왕이 살아 계신 때에 미리 어머니를 모시고 딴 곳으로 가서 딴 살림을 차리는 것이 옳겠다.” 아들들의 뜻을 전해들은 소서노는 주몽에게 청하여 많은 재물을 나누어가지고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온조왕 13(기원전 6)년 온조왕의 어머니가 61세로 죽었다고 기록돼 있다. 온조의 모친은 소서노를 지칭한 것으로 그녀의 생은 기원전 66~6년이 된다.

온조의 백제가 북부여계라는 것은 6세기 성왕이 백강변 소부리로 수도를 옮기면서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라고 명명한 것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온조는 남하하여 고구려 세력의 보복을 우려하여 궁중 안에 동명왕묘를 세우고 제사를 빠뜨리지 않았으며 대대로 제사를 받들도록 한 것은 바로 보호책으로 해석할 수 있다.
6세기 중반 이후 국력을 일본에까지 넓히고 중국 북부의 월주 등 구 북부여 세력의 복원에 성공한 성왕은 비로소 자신들이 부여 우태의 후손임을 천명한 것이다. 즉 정체성을 찾은 것이다.

안성 비봉산(사진 제공: 안성시청)
안성 비봉산(사진 제공: 안성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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