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백제사] 마한 수장국 ‘목지국(目支國)’은 안성인가(1)
[다시 쓰는 백제사] 마한 수장국 ‘목지국(目支國)’은 안성인가(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17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죽주산성(사진 제공: 안성시청)
죽주산성(사진 제공: 안성시청)

백제 초기 온조 개국… 고대사 비밀 풀 열쇠

도기동 토성에서 백제 초기시대 ‘木柵’ 시설 발굴

경기도 안성 땅은 백제 초기 우리 역사의 비밀이 숨겨진 곳이다. 2015년 11월 안성시 도기동에서는 뜻밖의 유적이 찾아져 학계를 흥분시킨 바 있다. 무엇이 찾아진 것일까.

옛 전사들은 자신의 영역을 보호하기 위해 성(城)을 쌓았다. 초기 성은 대부분 낮은 구릉 위에 토루(土壘)를 쌓는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토성 축조 기사는 중국 사서인 <위지(魏志) 동이전> 마한조(馬韓條)에 보이는데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노력에 종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토성은 전사들이나 관청을 보호하는 데 그리 좋은 시설은 아니었다. 적은 군사들을 막기에는 용이했으나 많은 군사들의 공격을 방어하기에는 쉽게 무너지는 허점이 있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고안해낸 것이 바로 통나무를 연이어 세워 막는 것이었다. 고대 전사들은 토성 위에 구덩이를 파고 굵은 나무를 일렬로 세워 책(柵)을 만들었었다. 이것이 바로 목책(木柵)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를 보면 집중적으로 목책 구축 기사가 나타난다. 이 시기 이미 마한시기에 쌓아놓았던 토성을 보축하기 위한 사례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도기동 토성유적에서는 기록으로만 전해졌던 백제 초기 목책 유적이라는 점에서 학계를 흥분시켰던 것이다. 이 목책을 쌓은 주인공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고삼미리내(사진 제공: 안성시청)
고삼미리내(사진 제공: 안성시청)

안성은 목지국의 고지인가

‘안성’은 <삼국사기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본래 고구려 내혜홀(奈兮忽)이었다가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는 백성군(白城郡)으로 개칭했다고 한다. 그러면 백제는 이곳을 어떻게 부른 것일까. 경덕왕 때 칭했던 백성군은 한문식 표현이다. 이를 순 우리식으로 한다면 ‘백제’라고 하지 않았을까.

백성군은 고려 초에는 안성현(安城縣)이라 일컬었으며, 1018(고려 현종9)년에 수주(水州)에 속하였다가 후에는 천안부(天安府)에 이속되었다. 안성이라고 이름한 것은 고려 초기가 된다. 왜 백성을 ‘안성’이라고 고친 것일까.

안성을 눈 안(眼), 즉 목(目)으로 비정하는 어문학자들도 있다. 고대의 ‘안성’을 목성(目城), 혹은 목지(目支)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고구려식 표기로 지(支)는 성을 지칭하는 것이니 고대 안성이 ‘목지’나 ‘백제’로 표기되었다는 것이다.

안성을 ‘목지’로 보면 백제 초기 고대사의 미스터리가 쉽게 풀릴 수 있다. 목지국은 마한 54개국의 수장국으로 초기 남하한 온조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온조는 처음 남하하여 부아악(負兒嶽, 북한산)에 올라 자신이 의거할 땅을 살폈는데 바로 한강유역이었다. 그런데 이 땅은 본래 마한 백제국(伯濟國)의 소유였다. 그러니까 안성, 즉 백제국은 목지국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온조는 한강유역 땅을 빌어 성을 구축했으며 이름을 ‘위례’라고 했다. 위례는 ‘울타리’의 고어로 성을 뜻하는 말이다. 온조는 마한국인 목지국 백제의 영역을 빌었으므로 그 전통성을 중시하려 하지 않았을까. 토착주민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마한 54개국과의 우호를 중시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목지국에서는 온조의 한강유역 정착을 환영했던 것 같다. 왜 이들은 고구려에서 남하한 일단의 무장집단을 환영했을까. 바로 한강유역에 이들을 살게 함으로써 변경을 자주 침입해 오는 말갈(靺鞨)과 신흥 고구려의 세력을 방어하는 완충역할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는 형국으로 정세는 흘러갔다.

예리한 철기로 무장한 온조의 백제국은 점점 군사력을 강화하더니 목지국의 영역을 넘보는 위력으로 성장한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온조왕 24년, 군사적 요충지인 웅천(熊川)에 목책을 세우자 목지국은 강하게 반발한다.

이 기록에 나오는 문제의 ‘웅천’은 지금의 어디일까. 이 시기 온조는 아산 지역에 내려가 사냥을 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고대 학자들 가운데는 서해 평택만을 웅천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 해석에 따르면 안성 목지국과 인근에 온조가 목책을 세우자 목지국왕이 우려를 나타낸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에 보면 9년에 마한 정복 기사가 보인다. 이는 안성의 목지국과의 통합을 얘기하는지도 모른다. 이 시기 마한 54개국 전체가 온조 아래로 넘어 온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당시 충청도 지역과 전라도 지역에 산거한 마한국들은 6세기까지 독립된 집단으로 존속되었음이 중국사서에 나온다.

안성 백제 초기 유적 발굴 현장(사진 제공: 안성시청)
안성 백제 초기 유적 발굴 현장(사진 제공: 안성시청)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