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4학년 몸무게 17㎏였다”

부모님 반대 무릅쓰고 매일 도전해

2005년 세계복싱선수권대회 우승

대한민국 역대 두 번째 기록 소유

[천지일보=김빛이나 기자] “저의 꿈은 제 손으로 선수를 지도해서 우리나라 역사상 세 번째 세계복싱선수권대회 금메달리스트를 만드는 것입니다.”

2005년 세계복싱선수권대회 51kg급 경기에서 당당하게 우승을 거두며 우리나라 역사상 두 번째 기록에 오른 전(前) 국가대표 복싱선수 이옥성 코치가 1일 천지TV 보이는 라디오 ‘운동극장’의 여섯 번째 주인공으로 자리해 이 같은 포부를 밝혔다.

국제대회에서 계속해서 좋은 성적을 쌓아야만 받을 수 있으며 ‘체육인들의 꿈’이라고 불리는 ‘체육훈장 백마장’을 2011년에 수상한 그는 방송이 진행되는 동안 지나온 삶을 회상하며 작은 체구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도전해 승리했던 순간의 감동을 전해줬다.

이 코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TV에서 복싱을 봤는데 너무 멋졌고 나도 세계챔피언이 돼서 부자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그때부터 부모님께 복싱을 시켜달라고 떼를 썼지만 쉽게 하락을 받진 못했다”고 말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가 너무나 약했기에 부모님의 걱정이 앞서서였던 것 같다고 했다. 초등학교 4학년 그의 몸무게는 17㎏였다고 했다. 중학교를 다닐 때도 당시 키 140㎝에 몸무게 24㎏였다고 했다.

이러한 몸으로 어떻게 운동을 지속할 수 있었을까? 이 코치는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체중을 빼는 일이 없었다고 했다. 항상 선배들에게 잡혀서 살을 찌우기 위해 먹어야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너무 무리해서 먹다보니 토하는 일도 많았고 오히려 살은 더 빠졌다고 했다.

이 코치가 운동을 하러 체육관에 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워낙 시골에 살았던 터라 체육관에 가기 위해선 집에서 나와 산을 하나 넘고 다시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그의 부모님은 이 코치가 스스로 지쳐서 그만둘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으나, 그는 끝까지 운동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운동선수로서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중학교 복싱부에 들어가면서부터였다. 그는 또래 중에서도 체중으로 따지면 가장 약골이었으나 정신력만큼은 남달랐다.

이 코치는 “중학교에서 복싱 선수를 뽑았는데 사실 그때 체중으로 보면 자격 미달이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나의 열정을 보고 뽑아주셨다”면서 “나중에 보니 선수 생활을 하면서 남은 사람은 또래들 중 나 혼자였다”고 말했다.

2005년 세계복싱선수권대회 51kg급 경기에서 당당하게 우승을 거두며 우리나라 역사상 두 번째 기록에 오른 전(前) 국가대표 복싱선수 이옥성 코치가 1일 천지TV 보이는 라디오 ‘운동극장’의 여섯 번째 주인공으로 자리해 말하고 있다. (출처: 천지TV 화면 캡처) ⓒ천지일보 2019.7.1
2005년 세계복싱선수권대회 51kg급 경기에서 당당하게 우승을 거두며 우리나라 역사상 두 번째 기록에 오른 전(前) 국가대표 복싱선수 이옥성 코치가 1일 천지TV 보이는 라디오 ‘운동극장’의 여섯 번째 주인공으로 자리해 말하고 있다. (출처: 천지TV 화면 캡처) ⓒ천지일보 2019.7.1

이 코치의 첫 경기는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가장 낮은 급의 체중 기준은 34㎏이었으나 당시 그의 몸무게는 28㎏. 턱 없이 모자랐으나 이벤트식으로 진행됐던 경기여서 참가할 수 있었다.

헤드기어를 착용했는데 너무나 커서 수건을 머리 위에 받치고 써야 했다. 경기 결과는 참패였다. 너무 화가 났다. 그 이유는 져서가 아니었다. 헤드기어가 너무 커서 움직일 때마다 수건이 내려와 눈앞을 가렸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의 열정에 감동을 받아 그에게 기립박수를 보냈다고 했다.

그렇게 그는 체중미달이라는 짐을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달고 다녔다. 시합에 나가면서 원서를 내고, 원래라면 시합을 뛸 수 없으나 양해를 구했고, 경기에 들어가고를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전국 신임 선수권 대회에 나가 금메달을 따게 된다. 드디어 그의 집요한 노력이 빛을 바라는 순간이었다.

이후 그는 고3 때부터는 체중을 빼는 등 조절해나가면서 시합을 뛰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부터는 국가대표로 발탁돼 시합에 나가게 됐다. 하지만 성적은 계속 2~3등이 계속됐다. 하지만 그는 그런 과정을 통해 오히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상대를 이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상대를 제압할 수 있을까? 이것을 계속 생각했다”며 “지면서 배웠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코치가 조언을 해준 대로 ‘인복싱’과 ‘아웃복싱’을 겸해서 같이 훈련했다고 말했다.

보통 복싱 선수는 이 두 가지 타입으로 나뉜다고 한다. 인복싱이 다소 공격적인 기술을 사용하는 방법이라면 아웃복싱은 수비에 더 무게를 두고 상대의 힘을 서서히 빼내어 이기는 방법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그런 그에게도 선수 생활을 그만두고자 했던 위기의 순간이 있었다. 세계대회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뒀던 그는 고등학교에서부터 라이벌이었던 선수와 맞붙게 됐다. 굉장한 자신감이 있었으나 결과는 참패였다. 그는 그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졌다.

그러한 그를 붙잡은 것은 다름 아닌 초창기 그가 운동하길 반대했던 그의 아버지였다. 그는 마침 세계대회를 앞두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 코치에게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세계대회에 참가할 것을 권했다고 했다. 대회에 나가기 너무나 싫었으나 아버지의 권유로 참가하게 됐다.

그 대회가 바로 2005년 세계복싱선수권 대회였다.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였다”면서도 “하지만 대진표를 보니 모두가 내가 전에 쉽게 상대했던 대상이었다. 그러다보니 ‘한번 동메달까지 노려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정말 쉽게 준결승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거기서 운명의 상대를 만났다”며 “그 선수의 펀치를 한 방 얻어맞는 순간 ‘아 쉬운 상대가 아니다. 내가 싸울만한 상대를 만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승부욕이 발동했다”고 했다.

이 코치는 그렇게 그 운명의 상대를 꺾고 결승에까지 올라 결국 우승을 차지했다. 그의 승리는 그에게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역사적인 승리가 됐다. 선수 생활 중 다사다난한 일들이 있었으나 그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시간이 갈수록 늘어가는 나이와 은퇴의 순간이었다.

그는 30살에 군 입대라는 국가의 부름을 받았고 그 길로 선수생활을 내려놨다고 했다. 재대 이후 자신의 이름을 단 도장을 열어 활동하기도 했던 그는 이제 복싱꿈나무인 교고생을 가르치는 코치의 길을 걷고 있다.

그는 과거로 돌아간다면 결코 다시 걸을 수 없는 길을 걸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누군가 자신을 뛰어넘어 그 길을 걸어가길 바라고 꿈꾸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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