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주요 교통수단인 지하철. 그 노선을 따라가 보면 곳곳에 역사가 숨어있다. 조선의 궁궐은 경복궁역을 중심으로 주위에 퍼져있고, 한양의 시장 모습은 종로를 거닐며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지하철역은 역사의 교차로가 되고, 깊은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와 관련, 켜켜이 쌓여있는 선조들의 발자취를 지하철 노선별로 떠나볼 수 있도록 역사 여행지를 내·외국인에게 소개해 보고자 한다.

흥인지문 ⓒ천지일보DB
흥인지문 ⓒ천지일보DB

한양 성문 중 가장 큰 ‘흥인지문’
국장행렬·능행길 통로로 이용
일제 땐 전차 다니기 시작
불야성 뒤에서 역사 버팀목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두 존재가 있다. 역사와 패션이다. 역사는 유난히 차분했다. 디자이너들이 모여드는 패션의 메카 속에서 동시에 있어서 일까. 빠르게, 더 빠르게 앞서가는 패션을 한발 치 뒤에 서서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역사는 어른스러움이 묻어 나왔다.

◆서울의 동쪽문인 ‘흥인지문’

벼룩시장의 끝판 왕인 동묘앞역과는 다른 풍경을 자랑하는 동대문역은 그야말로 현대와 전통이 함께 녹아있는 공간이었다. 한양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駱山)에서 길게 이어지는 성곽은 ‘흥인지문’과 닿아 있다. 하지만 반대편은 성벽이 끊겼다. 종로로 이어지는 대로만 눈에 띈다.

서울 성곽의 동쪽문인 흥인지문은 우리나라 보물 1호다. 동대문으로도 유명한 이 문은 1396년(태조 5) 세워졌으며, 1869년(고종 6)에 다시 지어졌다. 당시 한양도성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이 세워졌으며, 이 문은 서울의 숭례문과 더불어 가장 규모가 큰 성문이었다.

사대문의 이름은 유학에서 다섯 가지 덕목으로 꼽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서 따왔다. 실제로 북쪽 문인 숙정문을 제외한 흥인지문과 돈의문, 숭례문, 보신각 등의 이름 속에는 각각의 덕목이 들어 있다.

1978년 동대문시장 모습 (출처:서울역사박물관)
1978년 동대문시장 모습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이 중 흥인지문은 사대문 중 유일하게 이름이 네 글자다. 원래 이름이 ‘흥인문’이었고, 여기에 지(之)자 첨가됐다. 예로부터 동쪽이 낮아 왜구의 침입을 많이 받았는데, 동쪽의 기운을 높이는 뜻에서 산맥을 뜻하는 지(之)자를 첨가한 것이다.

흥인지문은 서울성곽의 동쪽 문으로서 인(仁)은 오행의 목(木)에 속하고 목은 동(東)에 해당하므로 흥인(興仁)은 곧 ‘동방’을 뜻한다고도 알려져 있다.

흥인지문은 조선시대 국장행렬과 능행길의 통로로 이용했다. 그래서일까.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춘 곳이 흥인지문이다. 규모와 위상도 훨씬 커 보였다. 보통 왕이 죽으면 마지막으로 흥인지문을 통해 나가는데, 영조 국장행렬 시 대여가 커서 흥인지문의 바닥 돌을 뺀 후 이동시켰다고 한다.

1930년경부터 약 38년간 서울 시내를 운행한 전차ⓒ천지일보DB
1930년경부터 약 38년간 서울 시내를 운행한 전차ⓒ천지일보DB

◆도시화에 바뀌는 옛 모습들

이곳이 본격적으로 발달을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때로, 흥인지문 앞으로 전차가 다녔다. 1899년부터 1968년까지 전차 종점으로 차고가 있었다. 또한 종로행이나 청량리행 손님이 전차를 갈아탔다. 교통이 발달하다 보니 이곳 주변은 서서히 발전하기 시작했다.

한국 전쟁 이후 도시화로 인해 상경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농촌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서울 곳곳에 자리 잡았다. 고층빌딩도 하나둘 들어서게 되는데, 동대문도 마찬가지였다. 변화되는 동대문. 옛 모습은 하나둘 잃어가기 시작했다.

이슬비 오는 날/ 종로 5가 서시오판 옆에서/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쫒기는 군상 속에서 죄 없이/ 크고 맑기만 한그 소년의 눈동자와/ 내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중략)//

옛날 같았으면 북간도라도 갔지/ 기껏해야 버스길 삼백리 서울로 왔지/ 고층건물 침대 속 누워 비료광고만 뿌리는 그머리 마을/ 또 무슨 넉살 꾸미기 위해 짓는지도 모를 빌딩 공사장/ 도시락 차고 왔지.

시인 신동엽(1930~1969)의 ‘종로 5가’라는 시이다. 동대문 앞에서 동대문을 찾는 소년과 함께 밤 11시 반 도시락 보자기를 가슴에 안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표현됐다. 낯선 도시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타향살이의 슬픔을 담아내고 있다.

발전을 거듭하면서 오늘날 동대문은 불야성을 이뤘다. 특히 패션이 자리 잡게 되면서 내외국인의 왕래는 더욱 자연스러워졌다. 이처럼 어느 지역보다 동대문에서 빠름이 가능한 것은 왜일까. 마치 집안의 가장처럼 역사가 든든히 버팀목이 돼 주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1966년 동대문 전차(출처: 서울역사박물관)
1966년 동대문 전차(출처: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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