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역사문화 여행⑥] 1호선 수원역, 수원화성서 꽃핀 조선의 르네상스
[지하철 역사문화 여행⑥] 1호선 수원역, 수원화성서 꽃핀 조선의 르네상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나라의 주요 교통수단인 지하철. 그 노선을 따라가 보면 곳곳에 역사가 숨어있다. 조선의 궁궐은 경복궁역을 중심으로 주위에 퍼져있고, 한양의 시장 모습은 종로를 거닐며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지하철역은 역사의 교차로가 되고, 깊은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와 관련, 켜켜이 쌓여있는 선조들의 발자취를 지하철 노선별로 떠나볼 수 있도록 역사 여행지를 내·외국인에게 소개해 보고자 한다.

수원화성의 팔달문 ⓒ천지일보 2019.5.13
수원화성의 팔달문. ⓒ천지일보 2019.5.13

정약용 설계한 ‘한국 성곽의 꽃’
수원역서 버스로 10여분 거리
5.7㎞ 성곽 둘레길 걷기 좋아

정조 효심 가득한 화성행궁
혜경궁 홍씨 회갑연 열리기도
행차 시 백성과 소통 목적도

[천지일보=장수경] 때는 바야흐로 1795년. 17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어가행렬이다. 그 중심에 한 남성이 있었으니, 바로 정조대왕이다. 행렬에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함께했다. 이 행렬의 최종 도착지는 어디였을까. 그 끝은 정조의 신도시인 화성행궁이었다.

◆정조의 꿈 담긴 수원화성

수원화성은 오늘날 경기도 수원 시내에 우뚝 솟아있는 팔달산(八達山) 아래에 위치해있다. 이곳의 대표 성문은 팔달문으로 수원화성 산책의 기점이 되고 있다. 1호선 수원역에서 버스로 십여 분 거리에 있으니 찾아가기도 편하다. 5.7㎞의 성곽을 따라 둘레길이 조성돼 있어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팔달산에서 내려다본 화성행궁ⓒ천지일보DB
팔달산에서 내려다본 화성행궁ⓒ천지일보DB

‘한국 성곽의 꽃’으로 불리고 있는 수원화성은 어떻게 짓게 된 걸까. 정조는 뒤주에 갇혀 숨을 거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어린 시절 정조는 이 모든 과정을 지켜봤다. 14년이 흐른 후 왕위에 오른 정조는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라고 선언하고, 그동안 마음에 담아뒀던 일을 단행한다. 바로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기는 것이었다.

사도세자의 무덤이 원래 있던 곳은 양주 배봉산 자락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물기가 많고 뱀이 나오는 흉지였다. 게다가 비운의 죽음으로 제대로 된 무덤도 조성되지 못한 상태였다. 정조는 전국 최고의 길지를 찾으라고 명을 내렸고, 14년의 계획 끝에 사도세자 무덤을 수원 화성 근처인 화산으로 이장했다. 동시에 화산에 있던 관청과 민가를 팔달산 밑으로 이전시킨 후 수원화성을 축성했다.

수원화성은 정약용의 설계를 바탕으로 쌓아졌는데, 장엄하면서도 우아한 외형을 자랑했다. 이로써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가 시작됐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위기를 겪었던 조선은 정조 대(代)에 문화의 절정기를 이루게 됐다.

수원화성 둘레길 ⓒ천지일보DB
수원화성 둘레.길 ⓒ천지일보DB

◆화성행궁과 지지대고개

수원화성의 정궁은 화성 행궁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살아계신 어머니를 정성스레 모시고 싶은 마음에서 지어진 곳이다. 또 정조가 장차 노후를 보낼 시설이었기에 대규모로 지어졌다. 평소에는 수원부 관아로 사용되다 정조대왕 행차 시 행궁 역할을 했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도 이곳에서 열렸다. 원래 회갑연 날짜는 6월 18일이었다. 하지만 회갑연을 위한 행차는 2월 9일로 잡았다. 농번기를 피해 농민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함이었다.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재현된 진찬연 모습 ⓒ천지일보DB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재현된 진찬연 모습 ⓒ천지일보DB

행차를 마치고 귀경길에 오를 때는 잠시 시흥에 머물러 백성의 고충을 직접 들었다. 만약 이 자리에서 세금이 너무 무겁다는 말을 들으면 환곡(봄에 조정에서 빌려준 곡식)을 탕감해줬다. 신하를 통하지 않고 직접 백성과 소통한 것인데, 화성행차의 또 다른 목적이 여기에 있었다.

정조대왕은 효심이 지극한 아들이었다. 보통 창덕궁에서 떠난 행렬은 시흥행궁을 거쳐 수원으로 들어온다. 이때 의왕역 동쪽에 ‘지지대 고개’를 넘어야 했다. 정조는 아버지 무덤이 보이는 이 고개를 넘을 때면 마음이 다급했는지 “왜 이리 더디냐(지지:遲遲)”며 역정을 냈다.

또 참배를 마치고 다시 한양으로 갈 때는 이곳에 멈춘 후 “천천히(遲遲) 떠나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능이 멀어지는 게 슬펐던 것이다. 그래서 이 고개를 ‘지지대 고개’라고 불렀다.

화성행궁 내부 모습 ⓒ천지일보DB
화성행궁 내부 모습 ⓒ천지일보DB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