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칼럼]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사암 정약용 생애 고찰(21)
[박관우 칼럼]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사암 정약용 생애 고찰(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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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1800년(정조 24) 6월 28일 승하한 정조는 그해 11월 6일 사도세자의 묘소인 수원의 현륭원(顯隆園) 국내 강무당(講武堂) 옛터에 건릉(健陵)이라는 능호(陵號)로 안장됐다.

정조에 이어 왕위를 계승한 순조는 즉위 당시 11세에 불과했기에 영조의 계비이자 증조할머니뻘이 되는 정순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해가 바뀌어 1801년(순조 1) 1월 10일 순조를 대신해 정순왕후가 역적죄로 천주교 신자들을 죽이라는 법령을 반포하면서 탄압의 신호탄이 시작됐다.

철저한 천주교 신자인 정약종(丁若鍾)이 천주교 관련 자료를 숨기고자 교리서(敎理書), 성구(聖具), 신부들과 교환했던 서찰 등을 책롱(冊籠)에 담아 운반하던 중, 그해 1월 19일 한성부 포교에게 압수당한 사건이 일어났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 신자들에 대해 당국의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됐다.

그해 2월 10일 정약용(丁若鏞)을 비롯해 정약종과 정약전(丁若銓) 형제,이승훈(李承薰),이가환(李家煥),권철신(權哲身)이 체포되어 국문을 받았는데 이가환과 권철신은 옥사(獄死)하고 정약종과 이승훈은 서소문밖에서 장렬히 순교하고 정약용과 정약전은 각각 장기와 신지도로 유배를 떠났다.

그러나 사암(俟菴) 형제는 그해 가을에 발생한 조카 사위 황사영(黃嗣永) 백서사건과 관련해 다시 서울로 압송돼 추가로 국문을 받은 이후 다시 유배를 가게 됐는데, 지역이 변동되어 사암(俟菴)은 강진, 손암(巽庵)은 흑산도로 새로운 유배지가 결정됐다.

그해 11월 5일 감옥에서 나온 사암 형제는 11월 21일 나주읍에서 북쪽으로 5리 지점인 율정점에 이르러 초가 주막에서 하루밤을 묶고 그 다음 날 다시 헤어지게 돼 사암은 강진으로 향하고 손암은 흑산도로 향해 출발했는데 결국 이것이 형제의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다.

손암은 사암이 해배(解配)되기 2년전인 1816년(순조 16) 흑산도에서 꿈에도 그리던 동생을 결국 만나지 못하고 향년(享年) 59세를 일기(一期)로 운명했던 것이다.

덧붙이면 생전에 사암과 우애가 깊었던 손암은 16년간의 흑산도 유배생활을 하면서 특히 주민들과 소통을 잘했다고 하며, 자산어보(赭山魚譜) 제하의 저서를 남겼는데 이는 당시 흑산도 근해에 있는 수산물을 어류(魚類),패류(貝類),조류(藻類),해금(海禽),충수류(蟲獸類) 등으로 분류해 조사한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서 실학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 탁월한 저서(著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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