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칼럼]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사암 정약용 생애 고찰(22) 
[박관우 칼럼]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사암 정약용 생애 고찰(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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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나주(羅州) 율정점(栗亭店) 주막에서 정약전(丁若銓)과 헤어진 정약용(丁若鏞)은 영산강을 건너고 영암을 지나 누릿재(옛 월출산을 넘어 월남(月南)으로 가는 재)를 넘고 석제원(石悌院), 현재 강진군 성전면 삼거리)를 거쳐 강진읍에 도착하면서 18년에 걸친 유배생활을 시작했다.

이와 관련해 사암(俟菴)은 강진에 도착했던 상황을 상례사전(喪禮四箋) 서문(序文)에 기록했는데 해당 내용을 인용한다.

“신유년(1801년) 겨울 나는 영남(장기)에서 체포되어 서울에 올라왔다가 또다시 강진으로 귀양 가게 되었다. 강진은 옛날 백제의 남쪽 변방으로 지역이 비루하고 풍속이 색다르다. 그 당시에 그곳 백성들은 유배 온 사람을 마치 큰 독을 지닌 사람인 듯 보아 가는 곳마다 모두 문을 부수고 담장을 무너뜨리면서 달아나 버렸다. 그런데 한 노파가 나를 불쌍히 여기고 자기 집에서 살도록 해 주었다. 그때부터 나는 창문을 닫아걸고 밤낮으로 혼자 앉아 있었다. 누구와도 함께 이야기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사암은 강진의 동문 밖에 있는 노파의 주막집 방 하나를 얻어 살게 됐으며, 일체의 바깥 출입을 하지 않고 두문불출(杜門不出)했다.

그러나 사암은 이러한 역경속에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았으며, 귀양살이를 하는 가운데 서서히 마음의 평온을 찾을 수 있었다.

1802년(순조 2) 장남 정학연(丁學淵)이 와서 근친(覲親)했였으며, 막내 아들 정농장(丁農牂)이 요절하는 불행한 일이 발생했다.

그 이듬해인 1803년(순조 3)에 사암의 저술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는데 구체적으로 봄에 단궁잠오(檀弓箴誤) 6권이 완성됐으며, 그 이후 상례사전(喪禮四箋)이 완성되었는데 무릇 잠오(箴誤)중의 대의와 널리 의론한 것을 모두 옮겨 기입해 놓았다.

또한 겨울에 예전상의광(禮箋喪儀匡)을 완성했는데 여기서 상의광(喪儀匡)이라는 것은 사전(四箋)의 하나이며, 모둔 17권으로 구성되었는데 사암이 밤낮으로 사상례(士喪禮) 3편과 상복(喪服) 1편과 그 주석을 취하여 정밀히 연구했다.

1804년(순조 4) 봄에 아학편훈의(兒學編訓義)를 완성했으며, 그 이듬해에 정체전중변(正體傳重辨) 3권이 완성되었는데 일명 기해방례변(己亥邦禮辨)이라고도 한다.

한편 사암은 강진 주막에 머물고 있을 때 자신이 거처하는 방을 “사의재(四宜齋)”라 하였는데 이는 마땅히 네 가지를 해야 할 방 이라는 뜻이다.

덧붙이면 '사의재(四宜齋)'는 매사에 경계하고 삼가는 태도로 스스로를 다스리자는 의미라 할 수 있는데 자신이 거처하는 방의 명칭까지 지으면서까지 스스로를 경계하려 하였던 그 모습에 숙연한 심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사암은 '사의재(四宜齋)'에서 주막집 노인의 아들을 불러 공부를 가르쳤는데 그 소문을 듣고 젊은이들이 모이면서 강진에서 사암의 제자들이 최초로 형성되는 계기가 마련됐다.

그의 제자로 들어온 이들은 6명이었으며, 손병조(孫秉藻)를 비롯해 황상(黃裳), 황경(黃褧), 황지초(黃之楚), 이청(李晴), 김재정(金載靖) 등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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