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경신년 봄에 정약용(丁若鏞)은 세로(世路)가 위험하다고 느끼고 결단을 내려 처자식을 거느리고 마재로 낙향했다.

그런데 며칠 뒤 임금이 사암(俟菴)이 마재로 돌아간 사실을 알고 내각(內閣)에 영(令)을 내려 재촉하는 소명이 있어서 부득이 서울로 돌아오니 정조가 승지(承旨)를 통해 유시(諭示)하기를 “규영부(奎瀛府)가 이제 춘방(春坊)이 되었으니 처소를 정한 뒤에 들어와 교서(校書)의 일을 하게 하라. 내가 어찌 그를 놓아두겠느냐”라고 했으니 정조가 아무리 주위에서 사암을 비방하여도 굳건히 신뢰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그 해 여름 6월 12일 사암이 달을 구경하면서 한가하게 앉아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다름 아닌 내각의 서리(胥吏)였다.

그는 한서선(漢書選) 10질을 가지고 와서 임금의 하교(下敎)를 전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요즘에 책을 편찬하는 일이 있으니 응당 곧 불러들여야 할 것이나 주자소(鑄字所) 벽을 새로 발랐으니 그믐께쯤 경연에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서리는 또 이르기를 “이 책 5질은 남겨서 가전(家傳)의 물건을 삼도록 하고, 나머지 5질은 제목을 써서 도로 들여보내는 것이 좋겠다”라는 하교를 전했다.

서리가 말하기를 “제가 친히 하교를 받들 때에 임금님의 안색과 말씀하시는 어조가 매우 온화하고 그리워하는 듯하였습니다. 한서선에 제목을 쓰라는 것은 아마도 겉으로 하시는 말씀이고 실제로는 안부를 묻고 회유하시려는 성지(聖旨)가 아닌가 합니다”라고 했다.

사암은 자신을 깊이 신임하는 정조의 유시를 생각하면서 갑자기 가슴 벅차오르는 감격을 느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이튿날부터 임금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는데 28일에 이르러 승하(昇遐)하고 말았으니 결국 정조가 12일 밤에 서리를 보내 책을 하사(下賜)하고 안부를 물은 것이 끝내는 마지막 말씀이 됐으며, 임금과 신하의 정의(情誼)는 그날 밤으로 영원히 끝나고 말았다.

임금이 승하한 날, 급보를 듣고 홍화문(弘化門) 앞에 이르러 조득영(趙得永)을 만나 서로 목놓아 울었으며, 임금의 관이 빈전(殯殿)으로 옮겨지는 날에 숙장문(肅章門) 옆에 앉아 조석중(曺錫中)과 함께 슬픔을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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