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칼럼]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사암 정약용 생애 고찰(16)
[박관우 칼럼]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사암 정약용 생애 고찰(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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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정약용(丁若鏞)이 곡산도호부사 재임중에 곡산에 귀양살이 하는 사람이 10명이 있었는데 고을에 살고 있는 400호에서 돌아가며 그들을 먹여주도록 하니, 천경법(踐更法)과 같아서 그 고통이 걸식하는 것보다 더 심했다.

유배 온 사람들이 날마다 울부짖으며 죽기를 원하고, 그들을 먹이는 주민들도 또한 불편하게 생각했다.

이러한 상황을 알게 된 사암이 곧 화전세(火田稅) 100여결을 덜어서 겸제원(兼濟院)을 세워 기와집과 돗자리 있는 방에서 살게 하고 끼니를 항상 마련해주니, 유배돼 온 사람들은 그 은혜에 감격하고 더불어 백성들도 편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게 유배자들의 생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발벗고 나섰던 사암이 몇 년 후에 유배자의 생활을 하게 됐으니 참으로 사람의 일이란 앞날을 예측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호적(戶籍)을 재작성할 때가 당도하자 아전들이 백성들을 위협해 호구 수를 늘리고 백성들은 뇌물을 바쳐 호구 수가 늘지 않게 하는데, 가난한 마을은 뇌물을 바치지 못하니 호구 수가 늘어만 가서 마을은 갈수록 말라빠지고, 돈이 있는 마을은 호구 수가 늘지 않으므로 더욱 부자가 돼 백성들의 살림이 고르지 못했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을 목격한 사암은 침기부(砧基簿)를 가져다 종횡표(縱橫表)를 작성했으며, 또 지도를 그리고 경위선(經緯線)을 만들어 백성들의 허와 실, 강하고 약함, 지역의 높고 좁음, 멀고 가까움을 상세히 알 수 있게 했다.

이렇게 하여 적감(籍監),적리(籍吏)를 없애고 관장이 호액(戶額)의 증감을 실정에 맞도록 할 수 있었으며, 며칠이 안 돼 호적단자(戶籍單子)가 일제히 들어왔는데 한 사람도 억울함을 하소연 하는 사람이 없었다.

사암은 이러한 호적 정리이외에 청사를 신축하는 일을 추진하였는데 이미 수원의 화성(華城)을 설계하고 한강의 배다리를 시설했던 건축기술을 바탕으로 가장 저렴한 경비와 적은 노동력을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또한 고을안의 목재를 활용하고 유형거(遊衡車),삼륜거(三輪車) 등을 제작해 물자 옮기는 일을 편리하게 했다. 아전과 장교들을 설득하여 자발적인 협조가 가능하게 한 결과 공장(工匠)의 힘든 일에 아전이나 장교가 힘을 기울이니 백성들의 노동은 최소화한 상태에서 청사가 완공되는 구체적인 결실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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