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 나라 중국. 그 드넓은 땅 동쪽 끝인 동북지역의 작고 작은 마을에 큰 기운이 솟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 땅은 청태조 누르하치가 태어난 곳이자, 그 아들과 함께 중국 천하를 제패할 꿈을 키운 장소다. 누르하치가 속한 ‘여진족’은 이곳에서 새 역사를 써 내려갔다. 그런데 여진은 ‘조선’과도 관련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를 중국 동북 현지  답사를 통해 하나씩 풀어가 보고자 한다.

홍타이지 무덤인 북릉 ⓒ천지일보 2018.11.18
홍타이지 무덤인 북릉 ⓒ천지일보 2018.11.18

 

청태종 홍타이지 무덤 ‘북릉’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中 산해관 밖의 황릉 중 하나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 침략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신생국이 생존하느냐, 사라지느냐는 2세의 역량이 매우 중요하다. 중국 수나라는 양제(2대 황제), 진나라는 호해(2대 황제) 때문에 나라가 휘청거렸다. 하지만 청태조 누르하치의 8번째 아들인 홍타이지는 달랐다.

누르하치가 여진을 통일했다면, 홍타이지는 내부개혁에 힘을 쏟았다. 홍타이지는 누르하치가 1626년 눈을 감은 뒤 후금의 2대 칸(汗)이 됐다. 이후 후금은 청나라로 국명을 바꾼다.

홍타이지 무덤인 ‘북릉(北陵)’은 선양시 황고구에 있다. 원래 이름은 ‘소릉(昭陵)’이지만 청나라 도읍지였던 선양(심양)의 북쪽에 있다고 하여 북릉 또는북릉공원이라 한다. 1651년 완성된 북릉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이곳은 산해관 밖에 위치한 2개의 황릉 중 하나다.

매표소에서 입장표를 산 후 들어가자 북릉공원이 나왔다. 웬만한 대학교 캠퍼스를 연상케 하는 규모다. 중앙에는 홍타이지 동상이 오롯이 서 있었다.

청나라 2대 황제인 홍타이지의 무덤 북릉 ⓒ천지일보 2018.11.18
청나라 2대 황제인 홍타이지의 무덤 북릉 ⓒ천지일보 2018.11.18

◆빠른 판단과 정책으로 역사 속 기록

누르하치에게는 16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 중 8번째 아들인 홍타이지는 사실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에는 형들이 너무 쟁쟁했다. 몸을 낮췄던 홍타이지는 절호의 기회를 기다렸고 그 순간을 재빠르게 잡았다. 그리고 황제로서 꿈을 펼쳐갔다.

그는 만주인과 한인(漢人)의 관계를 개선하는 등 후금과 융화책을 펼쳤다. 외몽고와 내몽고를 통합했고, 만주족 내부의 여러 정치세력을 통합했다. 이민족까지 자신의 세력으로 포함시켜 강력한 정치적 기반을 확보했고, 명나라를 위협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아버지 누르하치에 이어 펼친 빠른 판단과 정책은 오늘날까지 역사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홍타이지 동상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석패방’이 나온다. 궁전이나 능(陵)에 세우는 신성시 하는 중국 전통 양식이다.

우리나라로 보자면 사찰의 일주문이나 열녀문, 충렬사 등지에 세워진 홍살문 같은 역할을 한다. 무덤 부근에 다다르자 ‘신공성덕비정(神功聖德碑亭)’가 나왔다. 한자어와 만주어 두 가지로 글이 적혀있는데 홍타이지의 일생과 업적을 담아 놓았다.

용은문을 지나면 제사를 지내는 용은전(정자각)이 있고 그 뒤로 홍타이지의 무덤이 있다. 흰 모래 무덤은 소박함 그 자체였다. 무덤 가운데에는 아버지 누르하치의 묘와 같이 한 그루 나무가 심겼다. 환생을 뜻한다.

청나라 2대 황제인 홍타이지의 무덤 북릉 ⓒ천지일보 2018.11.18
청나라 2대 황제인 홍타이지의 무덤 북릉 ⓒ천지일보 2018.11.18

◆홍타이지와 병자호란

홍타이지는 우리 역사에도 등장한다. 서울 송파구에 있는 삼전도비. 청나라는 병자호란 때 압록강을 건너와 서울을 점령하고 왕의 항복을 받아내는데, 그 당시 황제가 홍타이지다. 영화 남한산성에도 인조와 홍타이지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병자호란은 치욕적인 사건이다. 그런데 특이한 점도 발견된다. 병자호란이전 만주족은 겨우 120만에 불과했지만, 병자호란 이후 8기군(8개의 깃발로 나눈 군대조직)을 중심으로 한 만주족은 220만명으로 늘어났다. 약 100만명이 급속도로 증가한 것이다.

홍타이지 무덤. 모래무덤 위에 환생을 의미하는 나무 한 그루가 심겨 있다. ⓒ천지일보 2018.11.18
홍타이지 무덤. 모래무덤 위에 환생을 의미하는 나무 한 그루가 심겨 있다. ⓒ천지일보 2018.11.18

이에 대해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는 ‘만주족’이라는 이름의 뜻을 먼저 알아야한다고 강조했다. 서 칼럼니스트는 “만주족의 옛 이름은 여진이다. 한문으로는 여진이라 썼고, 만주어로는 ‘주센’ 또는 ‘주현’이라고 불렀다”며“우리에게는 조선족이라고 들린다”고 말했다.

홍타이지는 심양 천도 후 여진을 만주로 부르도록 규정한다. 만주로 바뀌면서 기존의 부족단위로 귀속됐던 데서 벗어나 ‘크고 새로운 만주국’이라는 의미가 부여됐다. 서 칼럼니스트는“민족개념은 우리 인류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일”이라며 “혈통이나 문화 중심의 민족개념이 사회적 개념으로 바뀐 것”이라고 말했다. 즉, 원하면 누구나 자유롭게 만주족으로 들어올 수있는 것이다.

서 칼럼니스트는 “이런 개념에서 본다면 병자·정묘호란은 만주족의 수를 늘리려는 의도로 시도했을 가능성도 크다”며 “전쟁 후 여러 형태의 조선족이 만주족으로 대거 유입된 결과이기도 하다”고 해석했다.

실제로 만주족에는 여진족과 흑룡강, 연해주 일대의 피정복 소수 민족 외에 조선인이나 몽골인, 만주어를 구사하는 다양한 집단이 포함됐다. 청나라 때 편찬한 만주 씨족의 원류에 관한 책인 ‘만주팔기씨족통보’에는 조선인 72개 성씨가 팔기에 편입돼 있다고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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