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 나라 중국. 그 드넓은 땅 동쪽 끝인 동북지역의 작고 작은 마을에 큰 기운이 솟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 땅은 청태조 누르하치가 태어난 곳이자, 그 아들과 함께 중국 천하를 제패할 꿈을 키운 장소다. 누르하치가 속한 ‘여진족’은 이곳에서 새 역사를 써 내려갔다. 그런데 여진은 ‘조선’과도 관련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를 중국 동북 현지  답사를 통해 하나씩 풀어가 보고자 한다.

청태조 누르하치가 정사를 본 허투알라성 ‘한궁대아문(汗宮大衙門)’ⓒ천지일보 2018.10.28
청태조 누르하치가 정사를 본 허투알라성 ‘한궁대아문(汗宮大衙門)’ⓒ천지일보 2018.10.28

청나라의 첫수도 ‘허투알라’ 
동북 변방의 작은 시골마을
소박하지만 강함•생명력 느껴져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중국 심양 공항의 분위기는 남달랐다. 차디찬 바람과 함께 시야로 들어온 광활한 땅. 청태조 ‘누르하치’가 만주벌판을 달렸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에서 뜨거움이 솟아올랐다. 지난달 30일 시작된 본격적인 현지답사. 첫 발걸음은 호기심과 두려움, 그리고 설렘으로 가득 찼다.

차를 타고 2시간 남짓. 우리 일행은 중국 랴오닝성 푸순의 고대 도시인 ‘허투알라(Hetuala)’로 가고 있었다. ‘어떤 도시일까’ 궁금하던 찰나에 대형 표지판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청나라 황조의 조상의 땅, 비경 신비롭고 아름다운 땅, 허투알라에서 물어서 해답을 찾아보세요.’ 이 땅이 청나라(후금)와 인연이 깊은 곳이라는 게 확실했다.
 

허투알라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대형 표지판. 이곳이 청나라 첫 도읍지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천지일보 2018.10.28
허투알라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대형 표지판. 이곳이 청나라 첫 도읍지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천지일보 2018.10.28

◆청태조 누르하치 태어난 변방

허투알라는 그리 익숙한 지명은 아니다. 하지만 청태조 누르하치를 아는 이는 많다. 쉽게 말해, 누르하치가 드넓은 중국으로 나가기 위해 전략을 세우고 힘을 키운 곳이 허투알라다.

이곳에는 청나라의 첫 도성인 ‘허투알라성’이 남아있다. 지리적으로 보면 허투알라는 넓은 중국 대륙 중 동북 변방에 위치한 시골마을이다. 차를 타고도 한참 들어 와야 한다. 역사를 공부한 사람도 겨우 찾을 법했다. 차창 밖으로는 시골풍경의 논과 밭이 연이어 지나갔다. 언제 지었을지 모를 오래된 집들 사이로는 순수한 농촌 사람들의 모습이 느껴졌다. 낯익은 시골 풍경은 반갑기까지 했다.

어느덧 허투알라성 매표소 앞에 도착했다. 허투알라는 만주어로 ‘야트막한 언덕’을 뜻한다. 이 언덕을 따라 오르면 반원형으로 된 입구가 있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잔디 위에 ‘칸(한)왕궁(汗王宮)’이라고 적힌 비석이 비범하게 서 있었다. 칸은 ‘왕’이라는 뜻이다. 그 옛날 몽골제국을 건설했던 칭기스칸도 자신을 ‘칸’이라고 칭한 것처럼, 이곳도 왕의 왕국인 것이다. 

청태조 누르하치가 세운 허투알라성의 ‘한왕궁(汗王宮)’ 비석ⓒ천지일보 2018.10.28
청태조 누르하치가 세운 허투알라성의 ‘한왕궁(汗王宮)’ 비석ⓒ천지일보 2018.10.28

기록에 따르면, 한무제(한나라 황제) 시절 이곳은 고구려현이 설치됐다고 한다. 이후 고구려가 이곳에서 융성한다. 즉, 고구려의 땅인 셈이다. 고구려가 이곳에서 뻗어 나간 듯 누르하치도 고구려의 강인함을 이어받아 부국강병한 나라를 건설했다. 시대는 달랐지만 새 시대를 갈망하고 야망을 꽃피운 장소다.

누르하치가 태어난 곳도 허투알라다. 성 한쪽에 있는 생가는 그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대신 들려주는 듯했다. 여진족은 거주지역에 따라 ‘건주여진’ ‘야인여진’ ‘해서여진’으로 나뉜다. 누르하치는 이를 자신이 속한 건주여진으로 통일하는데, 바로 ‘고륵산(古勒山) 대첩’을 통해서다. 

이 전투로 누르하치는 만주의 실력자로 우뚝 선다.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힘을 기른 누르하치는 1616년 ‘후금’을 세운다. 여진족이 세웠던 금나라의 뒤를 잇는다는 뜻이 담겼다. 여진족은 훗날 부족명을 만주족으로, 국명을 후금에서 청나라로 바꾼다. 

누르하치와 황후가 함께 사용한 침궁 ⓒ천지일보 2018.10.28
누르하치와 황후가 함께 사용한 침궁 ⓒ천지일보 2018.10.28

◆소박함 가득한 허투알라성

허투알라성은 소박한 분위기다. 대청제국이라 불릴만하기엔 마치 세트장 같다. 크게는 샤먼신당과 직무실, 침실 등으로 나뉜다. 중국하면 보통 붉은색 장식의 건물을 떠올리는데 이곳은 파란색 빛이 강했다. 그 푸릇함은 강함과 생명력이 느껴졌다. 

허투알라성을 둘러볼수록 누르하치의 시선이 궁금해졌다. 간접적으로나마 그의 강인한 정신을 느끼게 해준 것은 ‘팔기(八旗)군’이다. 누르하치가 만든 만주족 군대로, 정황기·정백기·정람기 등 여덟 깃발로 나눠 일정한 인원을 꾸렸다. 각 단위에서 병력을 의무적으로 차출하도록 한 행정, 군사의 기본 조직이다. 특이한 점은 이들은 혈연과 상관없이 꾸려진다는 것이다.

칸왕침궁(汗王寢宮) 현판. 이곳은 누르하치와 부인이 함게 사용한 곳이다 ⓒ천지일보 2018.10.28
칸왕침궁(汗王寢宮) 현판. 이곳은 누르하치와 부인이 함게 사용한 곳이다 ⓒ천지일보 2018.10.28

다만 팔기군을 이끌던 지휘관인 ‘버일러’는 누르하치의 아들이나 조카 등 혈족만 가능했다. 버일러는 만주어로 ‘패륵(貝勒)’이라고 쓴다. 뜻은 ‘왕’이다. 누르하치는 ‘대칸’이고 아들들은 버일러 즉, 왕이 된다. 직무실에는 팔기군의 모습이 재현돼 있다.

1619년 후금은 명나라의 10만 군대와 사르후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를 하고 이로써 오랫동안 한족이 차지했던 랴오둥을 장악했다.

누르하치가 죽고 난 후 홍타이지(재위 1626~1643)는 후금의 두 번째 왕이 됐다. 홍타이지는 아버지의 원대한 꿈을 이어가는 게 당연하듯 같은 길을 걸었다. 홍타이지는 랴오둥의 한족을 포섭하기 위해 애썼다. 그는 투항한 한족 군인과 관료를 우대했고 중국의 통치 체제를 적극 받아들였다. 또한 오랫동안 앙숙이던 장성 이북의 몽골족을 통합하고 원제국의 옥쇄를 손에 쥐었다. 

답사에 동행한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는 “외진 곳에 살던 한 사내가 명나라도 꿈꾸지 못한 신세계의 꿈을 키웠다”라며 “과연 이 변방에서 무엇을 했을까. 청황제 누르하치는 왜 조선을 형제의 나라라고 불렀을까”라며 화두를 던졌다. 이는 곧 중국 동북 현지 답사를 허투알라에서 시작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누르하치 생가 ⓒ천지일보 2018.10.28
누르하치 생가 ⓒ천지일보 2018.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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