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참배 모습.
신사참배 모습.

최근 문재인 대통령의 적극 중재로 교황 방북이 가시화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단으로 꼽히는 천주교. 그러나 중세 천주교의 부패는 극에 달했고, 그 부패의 최정점에 교황이 있었다. 그들의 부패를 95개조 반박문에 써서 내걸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오늘날 개신교의 모태가 됐다. 종교개혁 501년이 된 지금 천주교는 얼마나 개혁되고 변화했을까. 천주교의 과거와 현재, 천주교의 부패에 반발해 태동한 개신교의 탄생과정과 실태를 진단한다.

한국 천주교 정교유착 논란

 

일제강점기 철저한 정교분리 입장

‘교민조약’ ‘선교조약’ 문언 규정

 

오히려 식민 동조… 정교유착 성격

해방 후 미군정과 친밀… 적산 불하

 

박정희 정권 때 반정권 세력 등장

정권유착 세력과 평행선 구도 형성

[천지일보=김성완 기자] 2000년대 중반 들어서 한국천주교회가 국가권력의 독선적인 정책추진과정을 비판함으로써 시민사회의 요구에 부응한 결과 한국사회로부터 정당성을 획득하기 시작했다는 평가다. 아울러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은 천주교에 대한 관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물론 이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천주교 성장의 이면에는 국가권력과의 유착 속에서 이뤄진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또한 천주교는 일제의 식민통치를 방조 부역하고, 신사참배에도 적극적이었다. 교회 지도자들도 친일적인 성향이 강했다.

실제 천주교가 일제 강점기 자국민을 외면하고 일본 신에게 절했다는 사실은 천주교사(史)의 암울한 진실이다.

◆한국천주교회 주교, 3.1운동 참여 금지시켜

일제 강점기 가톨릭은 한국이나 일본의 정치 문제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는 철저한 정교분리 원칙을 견지했다. 천주교회의 사회 참여는 하느님의 사업을 수행하는 교회의 임무와 배치된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었다.

한국 천주교회는 1899년 조선 정부와 ‘교민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신앙의 자유를 법적으로 보장받게 됐다. 조선 정부와 천주교회는 정교분리 원칙을 문언으로 규정했다. 천주교회는 정치에 간여하지 못하며 정부는 교회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조약은 1904년 ‘선교조약’에서 확인됐다.

하지만 일제하의 정교분리 원칙은 정교 유착의 성격이 강했다. 한국 천주교회의 경우 일제의 식민지 지배 통치를 방조, 비호하는 정도를 넘어 동조와 충성을 서슴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의 한국 천주교는 프랑스 독일 미국 등의 서구권 제국주의 국가 출신의 선교사들이 지도하고 있었다.

3.1운동 당시 파리외방전교회의 뮈텔 주교와 드망즈 주교는 만세운동 참가를 일절 금지시켰다. 당시 한국 천주교회를 대표하던 경성교구장(현 서울교구)과 대구교구장은 모두 프랑스인이었고, 한국 천주교회는 이들 두 교구장의 절대적인 영향 하에 있었다.

일부 한국인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3·1운동에 참여했지만 두 주교는 한결같이 3·1운동을 단죄했다. 이들은 3·1운동에 천주교회가 참여하지 않은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고, 신학생들이 운동에 가담하자 주동 학생들을 퇴학시키고, 징계 조처로 휴교령까지 내렸다.

또 3·1운동 때 기미독립선언서 서명을 위해 천도교 제3대 교주였던 손병희가 각 종단 종교계 유지들과 접촉해 민족대표를 꾸렸을 때도 천주교는 참여하지 않았다.

23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3.1운동 100주년의 성찰과 과제’라는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서 경동현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실장은 “천주교가 일제 강점기 때 대다수 민중의 요구였던 반봉건, 반제국주의 운동의 공론장에서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은 조선 천주교회가 독립운동을 포함한 정치적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공식 입장 때문”이라며 “당시 조선 천주교를 주도했던 파리외방전교회의 보수적 선교정책에 원인이 있었다. 다시 말하면 주교를 정점으로 조직된 천주교의 중앙집권적 위계 구조의 특성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광화문 기념비전 앞의 시위군중, 대판조일신문(1919).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광화문 기념비전 앞의 시위군중, 대판조일신문(1919).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한국 천주교회 ‘신사참배’에 적극적

1930년대 들어 신사참배 문제는 일제와 한국 천주교회 사이에 긴장 관계를 만들었다. 우상숭배를 금하는 천주교회의 교리와 충돌했기 때문이다.

신사참배란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의 하나로 1930년대 중반부터 강요한 것으로, 신사란 일본 왕실의 조상신이나 국가 공로자를 모셔놓은 사당이다.

일본인 거류민을 대상으로 국내에 처음 들어온 신사제도는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 한국인들에게 덴노제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는 기반으로 확대됐다.

1929년 세계 대공황으로 위기에 직면한 일본경제는 그 탈출구로 대륙진출을 꾀하면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내선일체를 표방한 황민화 정책이 강력하게 추진됐는데, 신사참배는 그중 가장 근본적인 정책이었다.

신사참배 문제는 당시의 교회 관계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이다. 일본제국주의는 일본인들과 식민지 민중 모두에게 일왕을 중심으로 복속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 군부세력의 침략정책을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해서다.

1932년 일본 천주교회 주교들은 일본 문부성에서 ‘신사참배는 애국심과 국가 의례일 뿐’이라고 말한 답변을 받아들여 신사참배를 허용했다. 주일 교황사절의 교령 발표에 따라 한국천주교회의 주교들은 신사참배를 허용하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로마교황청에서도 1936년 천주교 신자들의 신사참배를 허용하는 ‘훈령(Pluries Instanterque)’을 발표했다. 이에 교황사절 마렐라 대주교는 ‘국체명징에 관한 감상’이라는 제목의 서한을 통해 신사참배를 허용하는 교황청의 결정을 관할 지역교회에 전달했다. 한국천주교회 주교들은 훈령이 발표되자 주교 회의를 열어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허용했다. 이후 한국천주교회는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를 대변해 신자들의 신사참배를 종용하고, 아울러 조상제사를 허용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섰다. 당시 교황청과 한국천주교회 사이에 강한 로마 중심주의 지배구조가 형성돼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930년대 중반부터 국민의 사상통제가 본격화돼 신사 중심으로 애국반이 편성되고 신사 참배, 궁성요배, 국기게양, 황국신민서사 제창, 근로봉사의 월례행사가 강요됐다.

1940년 태평양 전쟁을 전후해서 한국 천주교회는 ‘조선 성교회 8교구 연차 주교회의 사목 교서’에서 조선 천주교회 신자들이 일본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정면으로 대항하지 않도록 한다는 내용을 발표하기도 했다.

개신교가 1938년 장로회 총회에서 강압적으로 신사참배를 수락한 이후에도 많은 성직자와 신도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해 순교한 사실에 비춰 볼 때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이에 대해 문정동성당 김흥진 주임 신부는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그라몽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포교를 시작했으나 1785년부터 근 100여년 간 박해를 받다 보니 정치에 소극적이었다”며 “조선 천주교회의 교도권자들은 일제의 강점하에서 오직 천주교회의 보존에만 급급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민족의 고통과 슬픔에 함께하지 못했다”고 솔직히 고백했다.

3.1운동하지 못하게 막은 로마 가톨릭 파리외방전교회.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3.1운동하지 못하게 막은 로마 가톨릭 파리외방전교회.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한국 천주교, 정권과 유착 속 교세 확장

일제의 무력 앞에 머리를 숙인 한국천주교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빈번하게 정권에 협력함으로써 전 세계 유례가 없을 정도로 폭발적으로 성장해 왔다. 한국사회에서 천주교의 위세는 대단하다.

2015년 발표된 제주대학교 대학원 김선필의 박사학위 논문에 따르면 한국 천죽교는 1945년 해방 이후 교회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여러 세력들과 친분을 쌓았다. 당시 남한을 점령하고 있던 미군정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 적산을 불하받을 수 있었다. 또 친일 우익세력과 연대해 토지개혁과 친일파 청산에 반대함으로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했다. 특히 천주교회의 반공주의는 이들 정치세력과의 연대를 강화시키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교황청과 한국천주교회는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과 대한민국정부에 대한 유엔 승인과 같이 이승만 정권의 출범과 안정화를 도모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줬다. 이승만과 한국천주교회는 대립하기도 했으나 소수 단체를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정권의 정책과 함께했다.

4.19혁명과 함께 장면 정권이 들어서자 한국천주교회는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나 군부쿠데타로 실각하자 주한 교황사절과 한국천주교회는 재빨리 군부세력의 쿠데타를 승인하는 태도변화를 보였다. 한국천주교회는 각종 시국사건에 침묵하고 박정희 정권을 비호했다.

1962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일사분란했던 한국천주교회의 태도에 분열이 나타났다. 정권과 유착관계를 맺으려는 움직임이 여전히 공고했지만 공의회를 수용한 구성원들이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고 나섰던 것이다. 여기에 불을 붙인 것은 평신도운동을 벌였던 지학순 주교 구속사건이었다. 이것을 계기로 한국천주교회 안에서는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연달아 분출됐다.

한국천주교회 주교단은 구성원들의 요구에 떠밀려 시국에 대한 입장을 표명했으나 여전히 소극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주교단의 태도는 전두환 신군부가 5.18광주민주화운동에서 벌인 학살행위 앞에서도 지속됐다.

1980년대 들어서 교회의 내적 분열은 폐쇄적인 세계관을 고수하며 사회참여를 통제하려는 주교들의 강력한 개입으로 일단락됐다. 이후 한국천주교회는 국가와의 유착 속에서 대외적 종교권력을 확장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을 확보해나갔다.

한편 내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각계각층이 분주하다. 지난달 28일에는 개신교계가 ‘신사참배 80년’에 대한 회개를 한다는 명목으로 광화문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기도 했다.

이와 달리 한국천주교는 뚜렷한 움직임이 없다.

이 같은 천주교의 반응에 대해 일각에서는 한국 천주교가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시민사회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자 과거를 잊어버린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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