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단침묵시위(1987). (제공: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사제단침묵시위(1987년). (제공: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한국 천주교 정교유착 논란

정의구현사제단, 민주화 앞장
천주교 비공식 사적 단체일뿐
군부독재에 반기 들며 결성돼

 

민주화운동 중심 지학순 주교
정작 제5공화국 때에는 잠잠

[천지일보=이지솔 기자] 한국 천주교는 그간 당대 정권에 크게 마찰음을 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천주교에 대해 일반적인 견해는 민주화‧인권을 지지한 일부 천주교 단체들의 목소리를 바탕으로 평가되는 면이 적지 않다. 이번 호에서는 정의‧인권‧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정의구현사제단)의 태동과 그 활동에 대해 조명해본다.

정의구현사제단은 내부적으로 교회의 사회현실 참여가 적절한가를 두고 논란의 대상이 돼왔다. 구성원의 정치 성향과 관련한 문제가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사제단은 이명박 정부 시절 미국산 소 수입 금지를 위한 촛불집회에 참가해 시국미사를 열었으며, 4대강 사업 반대 등의 활동을 벌이면서 친정부성향의 언론과 단체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반면 진보성향의 언론, 단체들은 사제단의 이런 행동이 국민과 함께하는 모습이라며 지지하고 있다. 즉 한국 천주교의 공식적인 입장이 친정부 성향을 띄었고 부패에 암묵적인 행보를 보여왔음에도 정의구현사제단 등의 활동이 이 같은 비판적인 평가를 덮어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구치소에서 출감한 지학순 주교(1975). (제공: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서울구치소에서 출감한 지학순 주교(1975년). (제공: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정의구현사제단 출현

한국 가톨릭 조직구조는 엄연히 중앙집권적인 형태를 띤다. 바티칸을 중추로 모든 가르침은 교황의 가르침에서 기인한다. 이는 하부 조직에서는 이 가르침을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한국에서 독특한 구조가 나타났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인권’이 강조됐고, 이를 따르는 소수 무리가 나타났다. 정의구현사제단이 나타나게 된 시초다. 이들은 한국에 있는 로마 가톨릭교회 일부 사제들로 구성된 조직으로, 천주교회 내 비인가 하부조직이었다. 즉 사제들의 사적 모임으로 결성된 것이다. 결국 이 단체의 입장은 한국 천주교회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상관이 없는 셈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후 가장 먼저 한국에 ‘인권’ 개념을 도입한 성직자로는 지학순 주교가 꼽힌다. 천주교 원주교구의 교구장이었던 지 주교는 1974년 바티칸에서 귀국하는 길에 긴급 체포됐다. 당시 종북 단체로 평가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의 자금으로 쓰도록 김지하를 지원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결성된 조직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다. 1974년 9월 26일 시국기도회 때 제1 시국 선언의 발표와 함께 꾸려졌다. 당시 지학순 주교는 “김지하에게 돈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북한과는 무관한 돈”이라고 주장했다.

지학순 주교가 연행되자 천주교계가구출에 나섰다. 김수환 추기경은 석방을 위해박정희 전 대통령과 면담했고 윤공희 주교는 신부들과 시국기도회를 열었다. 이로 인해 지학순 주교는 하루 만에 석방됐지만, 이어진 재판에서 지 주교는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고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이때 지학순 주교의 석방을 요구하며 정의구현사제단이 발족했다.

그의 석방을 위해 명동성당에서는 시국미사가 봉헌됐고, 미사에는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와 벨기에 대사도 참례했다. 바티칸 등도 유감을 표명하면서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했다. 박정희 정권은 외교 마찰과 가톨릭계와의 관계 악화를 우려해 결국 1975년에 지 주교를 석방했다. 석방 이후에도 지학순 주교의 민주화운동은 계속됐다.

김지하가 반공법 위반으로 수감되자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원주교구의 신현봉 신부 등이 구속되자 정부를 비판하기도 했다. 가톨릭노동청년회 총재를 지내며 유신정권의 노동정책을 비판하기도 했다. 정의구현사제단과도 함께 각종 민주화 운동 등에 참여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그의 민주화 운동은 돌연 5공화국 시절 자취를 감췄다.

70년대 그렇게 열렬하게 유신과 맞섰던 지학순 주교는 비록 적극적으로 5공과 협력한 것은 아니었지만, 5공에 대한 태도는 확실히 유신 정권과는 달랐다고 전해진다. 지 주교뿐만이 아니었다. 유신 때 박정희 정권과 정면으로 맞섰지만, 5공 전두환 정권에서의 태도가 묘하게 유화적이거나 협조적이었던 네 사람이 있었다. 윤보선 전 대통령, 천관우 시인, 지학순 주교, 강원용 목사다. 이를 가리켜 세간에서는 ‘윤천지강’이라고 불렀다.

일부 반유신 운동가들은 실망했다. 원주교구신부 중 한 사람은 지 주교에게 “주교님 변절입니까”라고 따졌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이후로지학순 주교는 사회운동 대신 사회복지나 장애인 운동에 더 관심을 두게 된다.

반면 정의구현사제단은 지 주교의 돌변한 행동과는 달리 1970년대와 1980년대 대한민국의군부 독재하에서 ▲유신헌법반대운동 ▲긴급조치 무효화 운동 ▲민주헌정 회복요구 ▲광주민주화 운동 등의 반 군사독재운동을 꾸준히 벌였다. 이를 놓고 천주교 전체가 마치 민주화운동을 벌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천주교가 중앙집권적인 조직 구조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사안에 입을 굳게 다물었던 한국천주교주교회의와는 달리 정의구현사제단은 각종 사회사 안에 목소리를 냈다.1987년 6월 항쟁 당시 서울대학교 학생이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폭로했고, 이후 제주해군기지 건설과 한미 자유 무역 협정의 사회적 이슈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2013년에는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박창신 신부가 2010년에 있었던 연평도 포격에 대해 북측 입장을 두둔하는 발언을 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2014년부터는 쌍용차 사태 해결을 위한 미사를 진행했다. 이같은 정치‧사회적 진보성향 활동으로 찬반 논란을 낳았다.

6.10대회이후 명동성당 사제단시위(1987). (제공: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6.10대회이후 명동성당 사제단시위(1987년). (제공: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정의구현사제단, 정교분리원칙 위배 논란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평가와 달리 보수 기독교는 정의구현사제단의 정치 관여는 정교분리 원칙에 위배된다며 이들을 향해 제의를 벗고 교회를 떠나라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실제 그들의 행보는 대중의 시선에서 보더라도 명백히 특정 정당이나 정치 세력에 편향돼 있다. 가톨릭교회는 1920년대 로마 교황청에서 반공을 표방하고 해방 후 반공에 앞장섰다.

이 같은 특성상 근본적으로 가톨릭은 북한에 동조할 수 없다. 그러나 정의구현사제단이 연평도 포격사태 등 남북 간의 갈등에 대해 보여준 지나친 양비론적 입장은 친북적이라고 인식될 여지가 충분했다. 이런 편향성 때문에 사제단의 정치적 입장 그 자체, 또는 그 이념적 편향성을 반대하는 측에서는 사제단을 이른바 ‘소수 좌파 신부’의 집단으로 규정하자는 목소리도 있었다.

특히 초기 타파의 대상이었던 군사 독재 정권의 종식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정치적 활동으로 좌익을 대변하고 있다는 지적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또한 그 활동 방식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과거 민주화 운동을 하던 시대와 유사한 시위와 투쟁의 형식으로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다수의 민주화, 인권 관련 단체에 대한 비난과 맥락을 같이하며 “한국의 인권과민주화를 지나치게 따지면서 막상 그보다 열악한 외국 북한의 인권에는 침묵한다”는 이른바 ‘한 입으로 두말하는 일관성 없는 단체’라는 비판도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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