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 2018.11.6
1683년 에스파냐 마드리드 이단심문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전쟁 등으로 끊임없이 탄압·학살

개신교 장로교로 현재까지 유전돼

최근 문재인 대통령의 적극 중재로 교황 방북이 가시화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단으로 꼽히는 천주교. 그러나 중세 천주교의 부패는 극에 달했고, 그 부패의 최정점에 교황이 있었다. 그들의 부패를 95개조 반박문에 써서 내걸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오늘날 개신교의 모태가 됐다. 종교개혁 501년이 된 지금 천주교는 얼마나 개혁되고 변화했을까. 천주교의 과거와 현재, 천주교의 부패에 반발해 태동한 개신교의 탄생과정과 실태를 진단한다.

[천지일보=김성완 기자] ▶1편에 이어서. ◆로마 종교재판소, 개신교 탄압

마녀재판과는 다른 결에서 이단 심문도 이뤄졌다. 종교재판이라고도 한다.

당시 이단은 기독교인이지만 잘못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인 데 반해, 마녀나 마법사는 원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둘은 성격이 다르다.

11세기 말에 신이라는 이름으로 치러진 십자군 전쟁으로 절대적인 힘이었던 교황의 권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울러 이어지는 가뭄과 전염병, 과다한 세금 등으로 백성들의 혼란과 분열이 팽배해진 유럽 사회에서 교황청은 시선을 돌려야 했다. 로마 가톨릭은 실추된 종교권력의 지위를 다시 공고히 하기 위해 종교재판소를 창설한다. 교황청은 로마 가톨릭 이외의 그 어떤 사상이나 교리도 용납할 수 없었다. 종교재판소를 최초로 만든 교황은 인노첸시오 3세다. 종교재판은 중세 이후 로마 교황청에서 정통 기독교 신학에 반하는 가르침을 전파하는 혐의를 받은 사람에 대한 재판으로, 1542년 교황 파울루스 3세가 로마 종교재판소를 만들었다. 로마 종교재판소는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이탈리아에 퍼져가던 프로테스탄트(개신교)를 탄압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로마 가톨릭은 프로테스탄티즘을 이탈리아 신앙공동체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여겼다.

로마 가톨릭은 또 위그노 전쟁(1562), 30년 전쟁(1618-1648), 잉글랜드 내전(청교도 혁명, 1642-1651) 등을 통해 개신교인들을 끊임없이 탄압하고 학살하며 가톨릭 절대 신앙을 강요했다. 이밖에 오늘날 중남미 나라들 대부분이 가톨릭 국가가 됐는데, 그들을 개종시키는 데는 성경적인 복음이 아니라 침략과 폭력, 학살이 사용됐다. 로마 가톨릭은 기독교 선교라는 명분으로 약 350년 동안 유럽의 네 배가 넘는 광대한 땅과 자원을 빼앗고 엄청난 숫자의 원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하며 중남미 대륙의 정복과 가톨릭화에 성공했다.

조찬선 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의 ‘기독교죄악사’라는 책에 따르면 종교재판소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박해를 통해 이단이라는 명목으로 약 5000만명의 개신교인들이 학살당했다고 한다.

존 도울링은 ‘로마니즘의 역사’에서 “606년 교황제도가 생긴 이래 지금까지 5천만명 이상이 살해됐다”고 했고 테일러 번치는 ‘다니엘서’에서 심지어 “5천만에서 1억명 가량이 살육이 자행됐다”고 기록했다. 역사가이자 정치이론가인 윌리엄 렉키는 인류 역사에서 어떤 집단보다도 가장 많은 무고한 인명을 죽인 집단이라고 고발했다.

2003년 교황청은 “기억과 화해: 교회와 과거의 잘못”이라는 내용으로 과거 교회가 하느님의 뜻이라는 핑계로 인류에게 저지른 각종 잘못을 최초로 공식 인정했다.

2016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16~17세기 종교개혁 과정에서 가톨릭의 개신교 탄압에 대해 사죄 했다. 교황은 당시 “무엇보다 먼저 예수의 몸에 상처를 낸 것과 다름없는 우리 쪽 분열의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며 “가톨릭의 수장으로서 기독교인들과 다른 교회들에게 비복음적 행동을 한 데 대해 용서와 자비를 구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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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혹한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을 벌인 존 칼빈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개신교, 가톨릭교회 그대로 닮아

로마 가톨릭교회에 반기를 들고 신앙의 자유를 외치며 장로교 등 개신교 시대를 열었지만, 개신교는 가톨릭교회의 전철을 그대로 닮아갔다. 가톨릭에서 보고 자라온 개신교인들은 특히 마녀재판을 그대로 수용했다.

뿐만 아니라 16세기 종교개혁이 불러일으킨 종교적 갈등, 민중운동, 전쟁 등은 사회의 긴장 상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역설적인 것은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개신교의 아버지 루터에 있어서도 마녀재판은 발견된다는 점이다.

“.....물의 요정이라 불리는 악마들이 얼마나 자주 성숙한 여인들과 소녀들을 물속으로 유인해서 그들과 공포스러운 결말로 끝나는 관계를 맺었는가......”

‘Jews And Their Lies (유태인과 그들의 거짓말)’에 따르면 당시 개천에서 목욕하다 들킨 여자들을 정결치 못하다는 이유로 마녀로 몰아 화형식을 준비하면서 루터가 한 말이다.

또 루터의 고향이자 종교개혁 거점의 하나인 독일은 가장 가혹하고 격렬한 마녀재판의 본고장이었다.

개신교 가운데 가톨릭을 능가하는 잔인한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을 자행한 인물과 교단을 꼽으라면 존 칼빈과 그의 후예인 장로교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존 칼빈은 프랑스 노용에서 서기관의 아들로 출생했다. 프랑스 출신이지만 스위스 제네바에서 종교국 특별기구의 수장을 맡았다. 절대예정론을 주장한 칼빈은 ‘주석의 왕자’라는 별칭도 가지고 있다. 수많은 주석을 쓴 그는 신약의 예언서인 요한계시록만은 해석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계시록을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정한 교리에 동조하지 않으면 ‘이단’으로 몰고 처형했다.

칼빈파는 마녀사냥을 대규모로 벌인 대표적인 교파로 칼빈의 제자 존 녹스(J. Knox, 1513∼1572)가 스코틀랜드로 건너와 칼빈의 종교개혁 사상을 전파하면서 장로교파로 자리 잡았다.

칼빈이 지배했던 당시 스위스에서 자행된 마녀재판을 보면 인구가 고작 700명에 불과했던 오베르 마르흐탈이라는 마을에서는 단 2년 동안 43명의 여자가 화형을 당했다.

‘유럽의 마녀사냥’의 저자 브라이언 레벡에 의하면 스위스에서는 8800명 이상의 마녀가 재판을 받고 5000명 이상이 처형됐다.

잉글랜드에서는 1640년대 대규모 마녀재판을 경험했다. 유럽의 종교개혁기에 영국 성공회 신도 일부는 칼빈 신학을 받아들여 성공회에서 벗어나 청교도라는 세력을 형성했다.

리챠드 쉔크만에 따르면 16세기와 17세기에 청교도에 의한 마녀재판으로 영국에서만 3만명이 살해됐고 영국 전역에서 무차별적으로 행해졌다. 1620년 이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해 오늘날 미국의 기초가 됐다.

청교도들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에 왔으나 다른 사람의 종교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유럽에서 이미 끝난 마녀재판을 시작했다. 169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세일럼 빌리지(Salem Villages)에서 일어난 마녀 재판이 대표적인 사건으로 185명을 체포해 19명을 처형하는 등 25명이 목숨을 잃었다.

종교개혁 후 500년이 지난 오늘날의 한국 개신교를 바라보는 시선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는 평가다.

한국 개신교는 담임목사직 세습, 초대형 교회당 건축, 성(性)적 타락, 재정비리 등 부패와 타락의 온상이 돼 가고 있다.

특히 장로교가 득세하는 한국 개신교는 이단논란까지 극심하다. 장로교 개종 목사들은 그들의 교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마녀사냥식’ 강제개종교육을 일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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