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은 박사의 역사이야기] 김염, 독립운동가 김필순의 아들 ‘중국의 영화 황제’
[이정은 박사의 역사이야기] 김염, 독립운동가 김필순의 아들 ‘중국의 영화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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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사)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독립운동가 김필순의 아들 김염
아버지 죽음으로 시작된 더부살이
영화배우 꿈꾸며 상하이로 건너가

중국에서 ‘영화 황제’ 칭호 얻기도
중일합작 영화에 출연 강요 ‘거절’
중일전쟁 후 상하이에 극단 조직

김염과 어머니 정경순(1952년 평양) ⓒ천지일보 2018.9.6
김염과 어머니 정경순(1952년 평양) ⓒ천지일보 2018.9.6

김염(金焰, 중국발음 진옌)은 소래마을 출신 최초의 근대 의사 김필순의 아들이었다. 아버지 김필순이 만주 서북부 치치하얼에서 1919년 9월 1일 41세의 나이에 갑자기 의문의 죽음을 당했을 때 그는 10살이었다.

생전의 아버지는 병원을 하여 번 돈 전부를 독립운동에 썼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땅이 있었지만 모두 개간한 동포들에게 나누어 주어 가족 재산은 아니었다. 살고 있던 치치하얼의 집은 러시아 사관의 관사였다. 개인병원을 하면서 러시아 군인을 위한 군의관을 겸하고 있어 관사에 살았었다. 그런 가장이 사망하니 집도 절도 남아있지 않았다. 농사를 전혀 모르고 농사를 지을 남자 어른도 없었기 때문에 김필순이 일군 이상촌으로 들어가 살 수도 없었다.

친지들이 치치하얼 교외에 낡은 집을 구해 주었다. 의사 부인이었던 김필순의 아내는 집 마당에 움막을 짓고 돼지를 기르고 채소를 가꾸었으며, 동네 사람들의 빨래를 해주며 겨우 끼니를 이었다. 좀 더 나은 수입을 얻고자 중국어를 열심히 배워 산파 일을 했다. 러시아 사관병원에서 빨랫감도 받아 왔다. 그렇게 해도 김필순의 아내 정경순은 시어머니 안성은을 모시고, 일곱 아들 김영(덕봉), 김억(덕호), 김염(덕린), 김강(덕상), 김덕홍, 김위, 김로, 모두 아홉 식구 입에 풀칠하기에 너무도 힘겨웠다.

김염이 소학교를 마친 이듬해 열세 살 때 할머니 안성은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입이라도 덜기 위해 김염과 김강(동생)을 데리고 딸들(큰딸 김구례, 서병호 부인; 둘째 딸 김순애, 김규식 부인)이 있는 상하이로 가겠다.”

두 고모는 상하이의 작은 집 한 채에 아래 위층으로 함께 살았다. 김염은 2층에 사는 둘째 고모네로 갔다. 고모부 김규식도 독립운동을 하고, 고모가 고국에서 유학 온 학생들 하숙을 치면서 생활을 꾸려가니 치치하얼의 집이나 궁핍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고모 집에서 얹혀사는데 고모부 서병호의 전부인 소생 아들 진동과 계속 부딪혔다. 얹혀사는 주제에 다툴 수 없어 참고 또 참았다.

상해 고모집 더부살이한 지 9개월이 되던 어느 날 지난(濟南) 산둥의과대학에 다니는 큰 형 김영(덕봉)에게서 편지가 왔다. 김염은 형의 편지를 받자 설움이 복받쳐 올랐다. 그는 그길로 말도 없이 큰 형 주소를 들고 집을 나섰다.

형 집에서 함께 사는 얼마 동안은 행복했다. 그러나 힘든 고학생활을 하는 형에게도 부담이었다. 다시 짐을 싸들고 그새 텐진으로 이사한 둘째 고모집으로 돌아왔다. 고모부 김규식 박사가 텐진의 난카이대(南開大) 교수 자리를 얻었던 까닭이다. 그는 난카이(南開) 중학교 급사일을 하며 3학년 청강생이 되었다.

김염의 어린시절(1916년 6세 때, 오른쪽에서 3번째) ⓒ천지일보 2018.9.6
김염의 어린시절(1916년 6세 때, 오른쪽에서 3번째) ⓒ천지일보 2018.9.6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가 한 캠퍼스에 있는 난카이 대학에서 운동회가 열렸다. 체격이 좋고 운동신경이 발달한 김염은 달리기 선수로 출전했다. 두 번의 예선에서 두 번 다 1등을 했다. 조선인 청년들이 운동회 구경을 왔다가 1등 하는 선수가 조선인 학생이라는 것을 알고 열렬히 응원했다. 결승전이 되어 출발선에 섰는데 구경꾼들 속에서 이런 말이 들렸다.

“저 조선족이 빨리 뛰는 것은 당연하지, 일본의 주구(走狗, 달리는 개, 앞잡이)니까.”

그 말을 듣자 김염은 그 중국 학생에게 달려들어 후려 갈겼다. 그 일로 고모부가 아니었으면 퇴학당할 뻔했다. 그때 난카이 대학에 입학하려는 조선인 학생들이 있었는데, 이에 항의하여 입학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그들 중에 님 웨일즈의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본명 장지락)도 있었다.

이듬해 난카이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공부에 뜻이 없었다. 미국 유학까지 한 고모부들 사는 곤궁한 모습을 보며 ‘공부해서 뭐하나’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다. 이따금 영화를 보고 그 분위기에 빠져 들었고, 영화잡지를 숨겨놓고 보다 고모부에게 들켜 혼나기도 했다. 그러다 마침내 영화배우의 꿈을 품고 반대하는 고모 내외 몰래 상하이에 있는 영화사(民新影片公司)의 어떤 감독과 잘 안다는 허신런(許心仁)이라는 텐진 주재 기자의 소개장 하나 얻어 들고 친구들이 모아 준 돈 7위안에서 6위안으로 배표를 사고 남은 1위안을 넣고는 상하이행 배를 탔다.

아편전쟁의 결과 상하이에는 미국, 영국, 프랑스가 조계(租界)라고 하는 치외법권 지역을 확보하여 외국계은행들, 중국의 27개 은행 중 22개 본사가 자리를 잡아 금융의 중심이 되었다. 상하이는 강대국들의 보호 속에서 비자 없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던 까닭에 온갖 뜨내기, 모험가, 혁명가들의 천국이었다. 노력에 따라 성공할 수 있는 기회도 많았다. 돈이 넘치고, 동양과 서양이 어울려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었다. 영화제작자들은 이런 상하이를 배경으로 다양한 이야기로 영화를 만들어 냈다. 영화의 시대가 상하이에서 꽃피기 시작하고 있었다.

김염은 주린 배를 움켜잡고 소개장에 씌어 있는 허우야오(侯曜) 감독을 찾아가서 영화사의 기록계원 자리를 얻었다. 그러나 얼마 안가 그 자리도 다른 사람의 농간으로 쫓겨나고 하루하루 삶을 위해 극장 검표원 겸 극장지기로 일하며 썰렁한 영화관의 긴 의자에서 새우잠을 자는 생활을 하며 배우의 꿈을 놓지 않았다.

김염이 영화계에 입문하여 일약 스타가 되었던 1930년대 상하이 와이탄지구 ⓒ천지일보 2018.9.6
김염이 영화계에 입문하여 일약 스타가 되었던 1930년대 상하이 와이탄지구 ⓒ천지일보 2018.9.6

어느 날 그를 눈여겨 본 완레이추안(万雷川) 감독이 난궈(南國電影劇社)라는 유명한 영화사의 톈한(田漢) 감독에게 소개했다. 난궈에서 일한 지 두 달되었을 때였다. 텐한 감독이 영화를 기획하다가 자금이 부족하여 번안극 <살로메>라는 연극을 무대에 올리고 있었는데, 그 다섯 번째 공연을 하는 날이었다. 주연배우가 나타나지 않았다. 관중들의 아우성쳤다. 감독은 김염을 쳐다보았다. 김염은 두 달 동안 매일 그 연극을 보면서 공부했고, 특히 주연배우 대사는 달달 외우며 연기연습을 하고 있었다. 김염은 생각지도 않았던 기회를 맞아 혼신의 연기를 했다. 연극의 막이 내렸을 때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텐한감독의 연극은 돈이 되지 않았다. 연극으로 돈을 벌어 영화를 찍을 수가 없었다. 김염은 영화사를 나와 다시 극장 검표원 겸 극장지기로 돌아갔다. 배고픈 나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에서 영화공부를 하고 돌아온 쑨유(孫瑜) 감독이 단역으로 출연했던 김염을 보고 <풍류검객(風流劍客)>이라는 영화에 출연시켰다. 그러나 흥행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김염의 가능성을 알아본 쑨유 감독은 그 다음해인 1930년. 김염이 스무 살이 되던 해 <야초한화(野草閑花)>에 유명한 여배우였던 롼링위(阮玲玉)의 상대역으로 김염을 주연배우로 다시 불렀다.

영화는 성공했고, 김염은 하루아침에 유명스타가 되었다. 어디를 가나 사람들은 배우 ‘진옌(金焰)’을 알아보고 열렬하게 환영했다. 그 다음에는 <들장미>에 신인배우 왕런메이(王人美)와 함께 출연하였다. 이 영화도 대 히트를 하여 왕런메이 또한 유명배우가 되었다. 1934년 두 사람은 결혼한다.

이 시기에 영화잡지 <전성>에서 영화 황제를 뽑는 영화팬들의 투표를 했다. 중국에서 활동하는 영화배우들 중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 배우’ ‘가장 친구로 사귀고 싶은 배우’ ‘가장 인기가 있는 배우’를 뽑는 것이었는데, 이 세 부분에서 김염은 모두 1등을 차지하고 ‘영화 황제’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처럼 3관왕이 된 배우는 현재까지도 김염 이외에는 없다고 한다. 김염은 중국에서 전무후무한 ‘영화 황제’가 된 것이었다.

영화배우였지만 그는 독립운동가의 아들이었다. 1937년 일본이 중국 내륙을 침략하고(중일전쟁) 이듬해인 1938년 일본 영화회사가 상하이 영화계에 진출하여 중일합작 영화에 출연할 것을 반 강제하였으나 김염은 이를 거절하고 홍콩으로 피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대륙에 남아 상하이에 배우극단을 조직하고 단장을 맡았으나 영화를 많이 찍지는 못했다. 1962년 위 절제수술을 받은 이후에는 후유증으로 영화를 찍을 수 없었고, 이후 병고에 시달리다가 1983년 12월 27일 73세에 상하이 화동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상하이 번화가 지우쟝로 (1920년대말) ⓒ천지일보 2018.9.6
상하이 번화가 지우쟝로 (1920년대말) ⓒ천지일보 2018.9.6

김염이 출연했던 영화는 다음과 같다.

애창여가(愛廠如家, 1958년) 공업부장, 해상홍기(海上紅旗, 1958년) 당서기, 폭풍우중적웅응(暴風雨中的雄鷹, 1957년) 노파이, 모친(母親, 1956년) 로등(老鄧), 위대적기점(偉大的起點, 1954년) 섭부장, 대지중광(大地重光, 1950년) 노침, 실거적애정(失去的愛情, 1949년), 영춘곡(迎春曲, 1947년), 승룡쾌서(乘龍快婿, 1947년), 임충설야섬구기(林沖雪夜殲仇記, 1939년), 무송여반금련(武松與潘金蓮, 1938년), 정천혈루(情天血淚, 1938년), 장지릉운(壯志凌云, 1936년) 순아청년, 도자연거(到自然去, 1936년), 낭도사(浪淘沙, 1936년), 신도화선(新桃花扇, 1935년), 대로(大路, 1934년), 황금시대(黃金時代, 1934년), 모성지광(母性之光, 1933년) 가호, 성시지야(城市之夜, 1933년), 공부국난(共赴國難, 1932년), 속고도춘몽(續故都春夢, 1932년), 야매괴(野玫瑰, 1932년) 강파, 해외견혼(海外鵑魂, 1932년), 인도(人道, 1932년), 삼개마등녀성(三個摩登女性, 1932년), 은한쌍성(銀漢雙星, 1931년) 양의운, 연애여의무(戀愛與義務, 1931년) 이조의, 도화읍혈기(桃花泣血記, 1931년) 김덕은, 일전매(一剪梅, 1931년), 야초한화(野草閑花, 1930년) 황운, 풍류검객(風流劍客, 1929년) 용비, 왕씨사협-속집(王氏四俠-續集, 1929년) 왕장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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